자신의 얼굴에 책임질 불혹의 나이에 이른 우리 전자산업은 줄곧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오면서 많은 품목에서 세계 유수의 제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왔다. 그동안 국내 전자산업은 가전분야를 기반으로 고도 성장을 지속해오다 컴퓨터·반도체·정보통신으로 바통을 이어 국가 산업의 기둥 역할을 담당해 왔다. 옛것을 돌아보고 연구함으로써 새 것을 알 수 있다는 「온고지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기 위해 우리가 처음 접했던 역사적인 전자제품을 통해 한국 전자산업 40년 발전사를 일람해 본다.
<편집자>
통신기기
전화기가 우리 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벨이 최초의 전화기를 발명한 1876년으로부터 6년 뒤인 1882년 3월, 텐진(중국 천진) 유학생 상운이 귀국하면서 휴대하고 온 전화기로 알려졌다. 이 제품은 단지 시험통화를 위한 것으로 상용화되지는 못하고 1896년에 이르러 서울-인천 간에 최초의 전화가 개통됐다는 기록이 있다.
국산 전화 단말기는 1960년대 들어 최초의 국산 전화기인 「체신 1호」가 개발되면서 본격화돼 1973년에 체신 1호를 개선한 「체신 70호」가 나왔으며 이것은 현재 사용하는 전화기의 기본이 되고 있다.
1981년부터 전화기가 관급제에서 사급제로 전환되면서 전화기의 기능과 모형의 패션화가 가속됐다.
최근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아날로그 휴대전화, 셀룰러폰, 개인휴대전화(PCS) 등의 휴대전화 이전에는 무선호출(일명 삐삐)이 먼저 서비스됐다. 84년 들어 SK텔레콤이 「한국이동통신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카폰」이라 불리는 셀룰러 방식의 아날로그 휴대폰을 상용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용요금이 너무 비싸 업무용일 경우에는 전화기 한 켠에 「카폰 사용대장」이라는 것을 비치했을 정도다. 휴대전화 단말기는 국내 업체로는 처음으로 삼성전자가 개발(모델명 SH-100)했다. 이후 96년 들어서 세계 최초로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서비스 상용화에 성공함으로써 디지털 휴대폰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시티폰·PCS까지 무선 통신에 가세, 87년 1만명에 불과하던 이동전화 가입자가 10년 만에 1천만명을 넘어서게 됐다.
전전자교환기
우리 나라가 시분할방식의 전전자교환기를 우리 기술로 개발키로 방침을 정한 것은 공간분할방식의 반전자교환기 제1기종(M10CM)을 도입하기 전인 76년 2월 경제장관 간담회에서였다.
81년 10월 정부는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과정에서 2백40억원을 투입해 시분할 전자교환기를 개발키로 구체화한 이후 82년 6월 교환기 생산업체인 금성반도체를 비롯해 대우통신·동양전자통신·삼성반도체통신 등의 기술진이 파견돼 공동 개발에 착수한다.
이 연구를 담당한 한국전기통신연구소의 전전자교환기연구사업단은 80년 1차, 81년 2차, 82년 3차, 83년에 4차·5차 시험인증을 거쳐 1만2백40회선 용량의 시분할방식의 전전자교환기를 독자 기술로 개발했다. 그리고 82년 3차 시험에서 이를 「TDX-1」으로 명명했다. 한국전기통신공사의 TDX사업단은 84년부터 85년까지 생산업체를 최종 확보해 기술을 이전하고 85년부터 업체별로 생산에 나섰다.
TDX의 개발은 독자적인 연구개발이라는 데도 큰 의의가 있지만 수요기관과 연구기관 그리고 산업계간의 공동개발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후 개발에 박차를 가해 87년 대도시용 대용량의 TDX-10 개발에 착수, 91년 시제품을 개발해 93년부터 공급하게 됐다.
컴퓨터
우리나라가 컴퓨터를 도입,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67년 4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IBM 1401」 기종을 3대 도입한 것이 최초다. 이 무렵 IBM은 물론 후지쯔·NCR 등 세계 유명 컴퓨터기업들의 판매망이 속속 국내에 진출해 판매경쟁을 벌임으로써 컴퓨터 도입은 크게 증가하기 시작해 80년대까지 범용컴퓨터의 도입은 5백22대에 달했다.
국내 최초의 컴퓨터는 74년 4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영국의 GTE로부터 받은 프로젝트로 사설전자교환기 제어용의 소형 컴퓨터를 조립하는 데 성공한 후 이를 「세종 1호기」로 명명한 바 있는데 이는 연구차원에서의 성과로 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PC의 시조는 81년 3월에 새로 설립된 삼보컴퓨터가 처음으로 개발한 8비트 퍼스널 컴퓨터(모델명 SE8001)로 지목되고 있다. 이 제품은 그해 10월 개최된 한국전자전에 첫선을 보여 일반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이듬해인 82년부터 생산을 본격화해 컴퓨터시대를 열었다.
반도체
83년 12월 1일 강진구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나라가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초고정도 집적회로인 64KB D램의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해 선진국들을 경악케 했다. 이후 삼성은 84년 10월에 64KB D램보다 4배의 집적도를 가진 2백56KB D램을 개발한 데 이어 86년 7월에는 1MB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은 4MB D램의 개발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공동연구개발체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자사와 금성반도체·현대전자산업이 주축이 되어 반도체연구조합을 결성하고 여기에 상공부·과학기술처·체신부 등 범정부적인 후원 아래 한국전자통신연구소와 공동연구 개발체제를 확립한다.
라디오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는 59년 11월에 생산된 금성사(모델명 A-501) 제품이다. 이 제품은 부품 국산화율이 60%에 달해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발전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산 라디오의 생산 보급은 매스 커뮤니케이션 발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일제 라디오 「산요」를 모델로 개발한 이 제품은 당시 선보였던 전압 1백V제품들이 실제로는 50V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해 이런 사정을 감안, 50V 전력으로도 들을 수 있도록 설계돼 그때의 어려웠던 전력 사정을 짐작케 하고 있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한 지 32년 만에 국산 라디오가 생산됨에 따라 수요가 급증, 국민들의 문화생활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흑백TV
라디오가 선보인 지 7년 만에 흑백TV가 금성사에 의해 66년 8월 국내 최초로 개발됐다. 당시는 외제가 판을 치던 시절이라 국산 TV가 생산되자 호기심과 함께 하늘을 찌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제품의 모델명 「VD - 191」은 진공관식 19인치 제품 제1호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국산TV의 개발은 경제 성장 중심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큰 전환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 TV의 가격은 일본산 17인치가 8만원, 19인치가 10만원, 미국산 19인치가 13만원이었던 데 비해 이 제품은 6만8천3백50원으로 당시 쌀 한 가마의 가격은 2천5백원이었다. 흑백TV 한 대의 가격이 쌀 25가마의 값이었다.
이같이 금성사 최초의 제품이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급증, 공급이 따르지 못해 KBS에서 공개 추첨해 공급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컬러TV
컬러TV는 74년 아남산업과 일본나쇼날전기의 합작투자사인 한국나쇼날이 생산한 모델명 「CT-218D」를 꼽을 수 있는데 당시 생산한 2만9천대 물량을 전량 수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무렵 흑백TV는 이미 13개사에서 연간 1백만대 넘게 생산되고 있었으나 정부가 컬러TV산업육성에 뚜렷한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아 업계는 적극 나서지 않은 채 관망하고 있었다.
한국나쇼날에 이어 한국크라운전자에서 컬러TV 생산에 나섰으나 76년 중단됐다. 이후 77년부터는 국내업체인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생산을 개시했으며 78년 대한전선까지 참여, 이른바 가전 3사가 모두 양산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컬러TV는 PAL과 NTSC방식을 놓고 갈등하다 NTSC방식으로 결정되면서 80년 8월 1일부터 시판이 허용되기에 이른다. 그 이후 우여곡절 끝에 80년 12월 1일부터 역사적인 컬러TV 방영이 전면적으로 실시됐다.
세탁기
우리 나라 가정주부들의 일손을 획기적으로 덜어주는 계기를 만든 국내 최초의 세탁기는 금성사가 69년 5월에 생산한 모델명 「WP-181」로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제품이다. 이 제품은 1.8㎏의 세탁 탈수 용량에 4단 수위 선택 스위치 등을 부착했다.
71년부터 생산을 재개한 금성사는 77년까지 매년 1종씩 신모델을 개발, 선보였으며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는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주부들의 생활이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추세로 바뀌면서 세탁기가 생활용품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78년에 국내 최초의 2조 자동 세탁기인 「WP-2508A」를 비롯해 79년에 4종, 80년에 마이컴 세탁기 3종, 81년에 2조식 대형세탁기와 콤팩트형, 83년에는 국내 최초의 신세탁 방식의 4.0㎏급 전자동 세탁기가 등장했다.
냉장고
대표적인 주방기기인 냉장고는 금성사가 65년 4월 국내 최초로 개발(모델명 GR-120)했다. 이 냉장고는 외제가 판치던 당시에 순수한 국산 기술로 개발된 것으로 일반 가정의 표준형으로 사용하기 편리하게 설계돼 있으며 내부는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플라스틱을 사용했다.
삼성전자는 74년 3월 일본 산요전기와 기술제휴로 소형 냉장고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간냉식 냉장고 도입에 이어 국내 최초로 핫라인 방식을 적용, 절전화 시대의 장을 열었다. 80년대 들어서는 소비자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요구도 다양해지면서 전자식 냉장고가 출현, 급속 냉동실·특선실·특선 야채실 등 다기능과 혁신적인 디자인 제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VCR
70년대에는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가전제품이 주로 출현했던 데 비해 80년대 들어서는 전자식 VCR와 캠코더·컴퓨터 등의 전자제품이 등장한다.
금성사는 78년 10월 중앙연구소 제3연구실에 VCR개발팀을 구성, 부품수가 컬러TV의 3∼4배인 VCR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일본은 VCR생산기술 노하우를 비밀에 부쳐 기술제휴를 거부했기 때문에 개발팀은 일본의 기술잡지와 제품을 놓고 분해 결합을 반복, 자력 개발에 나섰다. 그 결과 베타맥스형 대신 마쓰시타에서 만들고 있던 VHS방식을 택해 79년 7월에 기계식 VCR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원연기자 ywo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