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전자산업 40년> 80년대 명과 암

 명 : 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시에서 개최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는 우리 전자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다름 아닌 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만해도 마침 4차 경제개발계획이 마무리돼갈 무렵으로 앞으로 5년간의 경제개발계획을 새롭게 마련하는 중이었다. 전자산업에서도 제품과 기술의 국산화를 통한 산업의 고도화가 절실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점에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는 낭보는 우리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당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어려웠던 국민에겐 이 소식이 활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현대올림픽은 첨단 전자장치와 기술을 토대로 각종 기록이 측정되고 표시되며 방송을 통해 전세계 안방으로 전하는 등 전자기술의 올림픽이나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개최국마다 올림픽을 자국의 첨단 전자관련 기술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장으로까지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전자업계와 관련단체를 중심으로 성공적인 올림픽을 위해 개최까지 7년간 관련제품과 기술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고 나선 것이다. 우선 전자산업진흥회를 중심으로 우리상품을 전세계에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를 비롯, 유관기관들과 유기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해 올림픽관련 각종 장비와 시스템의 국산화에 나섰다.

 특히 방송기기·디스플레이장치·정보통신기기·전산화시스템 등의 최신기술과 제품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방송용 오디오·컬러TV·송신 및 중계기 등을 국산화했다. 81년 90% 이상 수입에 의존해 오던 방송기기를 86년에는 국산화율을 55%까지 끌어올렸다. 비교적 국산화율이 높았던 통신기기 중 무선호출기·차량용전화·광통신선로·전자식사설교환기·팩시밀리 등은 1백% 국산화했다. 계측기표시장치부문의 경우 국내수요가 극히 제한돼 있어 국산화율이 낮았지만 86년 아시아게임과 88올림픽을 계기로 전문업체까지 등장했다.

 88올림픽때 우리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분야는 단연 정보시스템을 들 수 있다. 올림픽전산시스템은 경기정보시스템(GIONS)·종합정보통신망시스템(WINS)·대회관리시스템(SOMS)·대회지원시스템 등 4개의 서브시스템으로 구축됐다. 경기정보시스템과 종합정보시스템은 LA올림픽때 사용됐던 정보시스템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로써 우리의 첨단전자기술을 전세계에 효과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우리에게 올림픽을 치러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우리 기술과 상품을 전세계에 자연스럽게 알려 시장을 확대하는 등 부수적인 효과까지 거뒀다. 실제로 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인 87년 전자산업의 수출은 1백억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쨌든 81년 서울올림픽 개최지 선정에서부터 88년 개최에 이르기까지 7년간 업계 및 관계기관의 끊임없는 제품 국산화 및 기술개발 노력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결실을 맺고 이와 함께 우리 전자산업은 고도화 길을 걷게 됐다.

 암 : 80년대 전자산업은 확실한 중흥기라고 간주해도 큰 무리가 없다. 높은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에서 국산가전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전자업계가 88올림픽을 전후해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또 전자수출 1백억달러 돌파, 전자업종이 수출1위 업종으로 부상하는 등 전자산업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뉴스가 많았다.

 이처럼 분명 한국 전자산업의 본격적인 도약기임에 틀림없는 80년대에도 동전의 양면처럼 또다른 이면에는 명암이 엇갈린 부분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수입자유화에 따른 시장개방 △선진국들의 잇따른 덤핑제소 △지적재산권보호압력 강화 등이다. 특히 80년대 후반부에는 거침없이 질주하던 전자산업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진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이같은 어두운 요인들은 결국 90년대 초반 경기침체와 노사분규 등으로 접목되면서 그동안의 성장세에 급제동이 걸리며 불황으로 빠지는 악재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게 우선 국내 전자업계의 성장신화를 뒷받침했던 요인 중 하나이던 수입규제의 빗장이 풀린 점이다. 87년 정부는 수입자유화 품목 1백70개를 선정, 발표하면서 48개에 달하는 전자제품을 포함시켰다.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우리나라는 국내 산업보호라는 명분 아래 시장을 굳건히 지켜왔으나 선진국들의 통상압력에 밀려 결국 문호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시장개방」과 「지적재산권 보호」를 모토로 하는 UR의 타결로 세계적으로 자국 산업보호를 위한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명분을 크게 약화시켜 약소국인 우리나라로서도 개방의 물꼬를 피하기 어려웠다.

 전자산업이 개방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수십년간 정부의 보호막에 안주해 있던 전자업계 전반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때까지 적어도 내수시장 만큼은 담보받았던 전자업체들은 선진국의 공룡기업들의 발호와 외산 선호현상과 결부돼 해외시장은 물론 내수에서도 치열한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됐다. 시장개방의 물결은 결국 9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3단계 유통시장의 개방을 거쳤고 가전에 이어 결국 통신시장까지 개방돼 전자산업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재촉했다.

 선진국들은 또 시장개방과 지적재산권 보호압력을 강화, 「복사」 「복제」 위주로 신화를 창조했던 전자산업의 뿌리를 흔들었다. 여기에 80년 후반부로 접어들면서부터 미국·유럽·호주 등 선진국들의 국산 전자제품에 대한 반덤핑제소가 잇따르면서 해외시장에도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선진국들은 컬러TV, 비디오·오디오 공테이프, VCR, 반도체 등 우리나라 수출주력 전자제품에 대해 일제히 반덤핑제소를 걸어 업계의 수출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러나 이같은 80년대에 등장한 악재들이 꼭 부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결코 아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선진국들의 개방압력과 한국 전자업체에 대한 견제가 오히려 정부와 전자업계 관계자들이 현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성장위주로 추진됐던 전자산업정책 역시 양보다는 질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고 가전 중심에서 정보통신분야로 다변화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