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사의 「A-501」라디오가 생산된 1959년을 한국 전자산업 원년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59년 이전의 움직임들을 보면 1885년 첫 전신업무가 시작됐고 27년에는 경성방송의 개국과 함께 일제 라디오가 일본인을 중심으로 보급됐다. 해방후 46년에는 범아전기가 미군용 건전지를 분해, 재생하더니 57년에는 삼양전기가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여 소규모 진공관 라디오 조립생산을 시도했다. 또 59년에는 동양정밀이 스트로저 교환기용 부품을 만들어 체신부에 납품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움직임들은 공급(생산자)과 시장(수요자)이라는 요건, 즉 경제개념으로서의 산업적인 틀과 주변여건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였다. 또한 실제로는 거의 모두 전자분야가 아닌 전기·통신 제품들이기도 했다. 그동안 논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책당국(당시 상공부)과 업계 등 대다수가 「A-501」이 생산된 59년을 전자산업 태동기점으로 보는 데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A-501」은 비록 핵심부품은 수입해 만든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독자적인 제품설계가 이뤄졌고 케이스 금형 역시 자체 제작된 최초의 국산 전자제품이었다. 또한 독자 브랜드의 개념도 처음 도입됐다. 여기에 같은 해 최초의 민간 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이 개국함으로써 「A-501」은 엄청난 잠재수요를 유발할 수 있게 됐다. 경제적 관점에서 산업형성의 틀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A-501」은 또한 전자산업이 공급과 수요의 상호작용에 의해 체계적으로 확대, 발전하게 되는 최초의 계기를 마련한 제품이기도 하다. 「A-501」은 소비자들의 성향에 따라 60년 「A-401」 「B-401」 「A-502」 「TP-601」 등을 3∼4개월 간격으로 잇달아 발표했다. 61년 이후 삼화전기·고미산업 등 전자부품 및 반도체 업체들을 등장시켜 라디오와 TV 등의 연관생산체제 구축을 이끌어낸 것은 무엇보다도 큰 성과였다. 여기에 덧붙여 정부는 60년대초 곧바로 국산 전자제품의 보호를 골자로 하는 「특정외래품 판매금지법」 제정 등 정책지원에 나섰다. 삼양전기가 케이스까지 모두 수입하여 단발형 라디오제품을 조립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자제품의 등장시점 측면에서 본다면 삼양전기의 라디오가 조립된 57년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산업사 측면에서 본다면 금성사의 「A-501」이 발표된 59년이 가장 빠른 연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