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자산업의 태동은 20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인 KDKA의 개국과 이와 때를 맞춰 개발된 3∼5극 진공관 라디오 등장에서 비롯된다.
라디오방송과 라디오의 등장은 당시까지 개발된 모든 전자기술이 하나로 모여 결합된 최초의 완성 전자제품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진공관 이외에 콘덴서·안테나·개폐기·스피커 등이 바로 라디오를 구성하는 부품이다. 미국 등 선진국 대부분이 라디오 생산 또는 라디오방송 개국을 자국 전자산업 태동 원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라디오의 특성을 감안한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전자산업 역시 금성사가 독자 설계한 국산 라디오 1호 「A-501」이 생산된 59년을 태동 원년으로 삼고 있다. 햇수로 보면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역사는 올해로 만 40년째로 미국 역사의 약 절반에 해당된다.
미국·일본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라디오 생산은 TV방송의 개국과 TV 생산으로 이어졌고 관련 전자부품을 비롯, 트랜지스터·집적회로(IC)·고집적회로 등 반도체부문의 성장이라는 산업의 수직계열화를 가져왔다. 또 냉장고·VCR·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 생산으로 이어지는 수평계열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특히 반도체산업의 융성은 80년대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져 본격적인 정보통신산업의 토대를 구축했다.
「A-501」을 생산한 이후 금성사는 꼭 1년 만인 60년 8월 역시 국산1호 트랜지스터 라디오 「TP-601」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도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54년에야 상용된 것이었다. 이는 미국에 비해 40년 가까이 뒤져 있었던 라디오분야 조립생산 기술이 6년 내로 단축된 것을 의미했다.
5·16 이후 정부는 전자산업을 수입대체산업으로 지정함과 동시에 국산화를 추진함으로써 수출 전략산업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부족한 기술과 자본을 외자도입법을 제정하여 보완하는가 하면 국산제품에 대해서는 완제품 수입을 통제하는 「특정외래품 판매금지법」의 제정도 서둘렀다.
이들 정책의 기반이 된 것이 61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정부 정책들은 성공적으로 수행돼 콘덴서·트랜지스터·다이오드·건전지 등 가전용 부품의 생산이 활기를 띠었다. 마침내 66년 금성사가 진공관식 흑백TV 「VD -191」을 생산해냄으로써 국내 전자산업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TV 생산은 라디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부품을 필요로 했으며 연관산업과 고용창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자산업에 대한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자 정부는 69년 「전자공업진흥법」을 공포하고 이를 근거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확정하는 등 70년대 이후까지를 염두에 둔 중장기 정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70년대는 정부가 구미전자공업단지(71년)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76년) 등 각종 기술연구소 설립을 추진, 선진국형 산업기반을 마련하는 시기였다. 상공부의 중공업국이 전기전자공업국으로 확대 개편되는가 하면 정부정책을 민간에 연계하는 역할을 맡기기 위해 한국전자산업진흥회(76년)의 탄생을 유도하기도 했다. 컴퓨터 국산화, 반도체 연관산업의 정착, 컬러TV 생산 등은 바로 이 시기에 이뤄졌다.
컬러TV 방송 및 컬러TV 국내시판으로 시작된 80년대는 가전·부품·반도체·컴퓨터·통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자산업의 본격적인 도약기로 기록되고 있다. 81년 삼보컴퓨터가 국산 PC 1호를 개발한 데 이어 같은 해 자체 기술에 의해 전자식 VCR가 개발됐다. 한국이 신흥 전자강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갈수록 거세지는 무역장벽을 피해 금성사·삼성전자·대우전자 등은 북미·중미·유럽 등에 현지 생산시설을 마련하는 등 90년대 이후까지를 내다보는 전략적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전기통신과 컴퓨터의 확대보급은 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와 82년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정보산업에 대한 관심은 더욱 깊어져 83년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를 선포하고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87년 마침내 전화가입자가 1천만명을 넘어섰고 88년부터는 정보화 지름길이 된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또한 89년에는 전전자식 교환기 「TDX-1B」가 개발됐고 88년부터는 이동전화서비스가 시작됐다.
일본이 2백56KD램을 개발한 가운데 한참 후발이던 삼성전자가 같은해 64KD램을 개발한 것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삼성은 80년대 내내 2백56KD∼16MD램 등의 개발에서도 일본을 간발의 차로 따라가는 저력을 발휘했다.
80년대 전자산업계 최대 사건은 역시 87년의 수출 1백억달러 돌파라고 할 수 있다. 이어 88년부터는 섬유류를 제치고 전체 수출부문 비율 1위(26.8%)로 부상했다. 수출부문 1위는 현재까지 고수되고 있다.
90년대 들어 국내 전자산업은 최첨단 정보통신기술의 등장이라는 세계적 추세에 맞춰 전자정보통신산업으로의 한차원 높은 도약을 시도했다.
산업올림픽 「엑스포」가 93년 대전에서 개막됐는가 하면 94년 삼성전자는 마침내 2백56MD램에서 일본을 따라잡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95년에는 PC보급 확대와 케이블TV방송이 개막돼 본격적인 멀티미디어산업을 창출해냈는가 하면 이동전화 1천만가입자 시대를 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