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도 신통치 않은 미국의 한 대학생이 원자탄을 설계했다. 이를 믿지 못하겠다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20년쯤 전에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뉴저지주 프린스턴대 물리학과 3학년인 존 아리스토틀 필립스가 바로 그 주인공. 사실 그는 그 당시 D와 F학점으로 점철된 성적표에 학사경고까지 받아 유급 처분이 내려진 평균 이하의 열등생이었다.
그는 한 과목만 더 낙제하면 퇴학당할 위기(?)에서 저명한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교수가 개설한 과목 하나에 수강 신청을 했다. 다이슨 교수는 군축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핵무기 전략과 군비축소」라는 강좌를 한 학기 동안 열었는데 수강생이 8명에 불과한 조촐한 수업이었다.
핵전쟁 수행 능력과 가상 핵전쟁 등에 대한 열띤 토론이 오가며 수업이 진행되던 어느 날, 테러리스트들이 핵무기로 미국 정부를 위협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런 설정은 요즈음에는 액션 스릴러 영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당시만 해도 생소한 가정이었다.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그런 상황의 실현성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핵 폭탄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맞다」 「천재나 만들 수 있다」 등등. 그러나 필립스는 문득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과연 그럴까? 만약 나 같이 중간도 못 되는 물리학도가 이론적으로 원자폭탄을 설계한다면 정부에 새로운 경각심을 일으키는 정책적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는 그 학기의 연구 과제로 「원자폭탄 제조법」을 쓰기로 결심했다. 주어진 시간은 3개월 남짓.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기에 그는 지도교수를 찾는 일부터 난감했지만 고심 끝에 다이슨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필립스가 농담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정부의 기밀 정보는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겠지? 일반 도서관에 있는 자료들로만 해결해야 하네. 또 나는 방향만 잡아줄 뿐, 구체적인 작업은 전부 자네 혼자서 해야 해.」
필립스는 워싱턴DC로 가서 기밀문서 취급에서 해제된 자료들을 뒤졌다. 그 결과 로스앨러모스 계획(1945년에 수행된 최초의 원폭제조 프로젝트) 문서들과 미 국립기술정보국에서 낸 원폭 개발기술의 역사서, 그리고 원폭제조 프로젝트에 처음 참여한 과학자들에게 배부된 1943년판 기술지침서 등을 구했다. 그 지침서에는 당시까지 핵분열 현상에 대해 알려진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기밀문서 취급에서 해제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해진 이 모든 자료들을 입수하는 데 필립스는 단돈 1만3천원 정도를 들였을 뿐이다.
그가 설계하려는 것은 플루토늄 원자탄이었다. 동그란 공 안에 밀도가 낮은 스폰지 같은 플루토늄239 덩어리가 있고 주변을 귤껍질처럼 화약이 둘러싸고 있다. 화약이 폭발하면 그 압력으로 플루토늄 스폰지가 압축되면서 임계 상태가 되어 급격한 핵분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필립스의 원폭 설계는 거의 완성되었으나 단 하나, 화약의 배치 방법과 그에 알맞은 적절한 화약 선택이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는 제출마감 1주일 전까지도 마지막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당시 그가 활동하던 연극 동아리의 공연 연습 도중에 해결의 실마리를 얻었다. 남자들이 여장을 한 채 반짝이 스타킹을 신고 발을 쭉쭉 차올리는 우스꽝스런 춤이었는데 그는 문득 그 스텝과 킥의 패턴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약의 종류를 알기 위해 그는 듀폰 회사의 폭약과장과 통화했다. 「원폭」이라는 말은 꺼내지 않고 요령껏 유도질문을 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정보를 알아냈다. 그 결과 필립스는 학과에서 혼자 A학점을 받았다.
<박상준·과학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