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애니메이션, "세계"로 길 떠난다

 토종 애니메이션들이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 상영중인 장편 만화영화 「아기공룡 둘리」는 유럽 애니메이션시장을 향한 신호탄. 둘리나라가 제작하고 손에손필름이 배급을 맡은 이 작품은 베를린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프랑크푸르트를 비롯, 쾰른·뮌헨·함부르크 등 독일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릴레이 상영에 들어갔다. 「아기공룡 둘리」의 해외배급은 체인망을 갖춘 대형극장을 공략하지 못하고 어린이 관객대상의 소극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쉬운 대목. 하지만 해외 개봉관의 두터운 벽을 허문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99년 애니메이션업계가 거둬들인 쾌거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극장을 제외한 판권이 독일 최대의 미디어그룹인 베타 타우루스에 25만달러에 판매됨으로써 앞으로 TV와 비디오 시장에서의 또 다른 흥행도전에 업계의 눈이 쏠릴 전망이다.

 설 연휴 극장가에 개봉된 풀 3D 애니메이션 「철인사천왕」 역시 해외시장에서 풍성한 수확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제작사인 B29엔터프라이즈는 앞으로 3년간 1천만달러 매출보장을 기본 계약조건으로 미국 라이트포인트 엔터테인먼트사와 수출의향서(Letter of Intent) 교환을 마치고 마무리 협상만 남겨두고 있다. B29측은 현재 일본과 남미의 영화사들과도 상담을 진행중에 있어 「철인사천왕」의 수출액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알렉산더」 「바이오캅 윙고」 「뷰티풀 데이즈」 「붕가부」 「핌라이트」 등 TV시리즈와 극장용으로 제작중인 10여편의 만화영화가 모두 해외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이로써 4년전 「아마게돈」과 「블루시걸」의 잇단 흥행실패로 침체의 늪에 빠졌던 우리 애니메이션업계가 올해는 제2의 도약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그러나 이같은 국산 애니메이션 수출붐이 용두사미로 막을 내리지 않으려면 좀더 치밀하고 다각적인 수출전략이 뒷받침돼야만 한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석기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장(54)은 『창작을 외면하고 하청구조에 길들여진 산업구조 자체가 태생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현재 애니메이션산업에 종사하는 인력은 2만명으로 외형적인 시장규모만도 세계 3위에 이른다. 지난해 수출액은 1억달러로 이는 출판인쇄·컴퓨터게임·음반·라이브공연을 앞서는 수치다. 하지만 수출의 대부분이 미국·일본·캐나다·유럽 등지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납품으로 순수한 창작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문제. 기획과 스토리, 원화는 모두 애니메이션 선진국들이 맡고 우리는 후반작업에 해당하는 선화·동화 등 그래픽만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비정상이고 왜곡된 산업구조는 최근 제작되는 국산 만화영화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하청작업으로 숙련된 애니메이터들을 양성한 결과 그래픽은 흠잡을 데 없는 반면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전문 시나리오 작가의 부재로 줄거리가 엉성하고 짜임새가 없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 미국시장에서 「모노노케 히메」로 돌풍을 일으킨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 애니메이션업계의 구조적인 취약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우선 빈약한 소재가 수출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애니메이션 왕국 일본의 경우 「유기농업으로 농촌을 가꾸는 젊은이와 도시처녀의 사랑이야기(추억은 방울방울)」부터 「너구리와 인간의 전쟁(평성너구리 전쟁 폼포코)」 「늑대인간의 전설(모노노케 히메)」 「어린시절의 동화(이웃집 토토로)」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소재로 미국과 유럽 관객들을 공략하고 있다. 반면 우리 업계가 수출을 염두에 두고 제작중인 애니메이션은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권선징악의 구도 아래 환경문제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이다.

 관객의 연령을 아동으로 제한해 성인 취향의 작품이 없다는 것도 우리 업계의 전략적인 실책이다. 한해 동안 제작되는 TV 시리즈물이 60편을 웃도는 일본의 경우 만화영화를 보는 주요 관객은 아동이 아니라 성인들이다.

 만화전문 케이블TV가 아니라 지상파 방송국에서 심야시간에 만화를 내보낼 수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원동력은 바로 폭넓은 관객층이다.

 애니메이션계의 스타 부재도 문제다.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션 신으로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를 비롯해 최고의 흥행감독 마야자키 하아오, 다카하타 이사오 등 거물급 인사들이 많은 데 비해 우리는 작가정신으로 무장한 만화영화 전문감독을 길러내지 못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정책부재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국제적으로 제작능력을 인정받으면서도 우리 애니메이션이 하청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부의 제작지원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경우 세제혜택은 물론이고 제작비의 40% 정도를 정부가 무상으로 지원해준다. 그에 비하면 우리 정부는 이제 애니메이션산업 육성을 위한 초안을 마련했을 뿐 아직 충분한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같은 원초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 수출은 작품 편수도 적지만 수출조건 역시 열악하다. 극장용 판권은 배제한 채 시나리오 수정을 전제로 계약이 성사되는 경우가 많다. 로봇 애니메이션의 경우도 변신로봇 등 캐릭터 판권을 위주로 TV와 비디오 판권계약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 극장판권이 이루어진 경우는 아직 없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환경을 고려할 때 제작사들이 수직적·수평적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않으면 시장개척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수출시장을 입체적으로 공략하려면 출판만화에서부터 캐릭터상품도서비디오TV시리즈게임극장용 장편 만화영화에 이르기까지 동시제작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자본이 열악한 국내 제작사들로서는 이같은 「원 소스 멀티 유즈」 방식의 기획이 어렵다는 것. 또 영화사가 작품제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펀드 레이징에서부터 홍보와 마케팅 전문업체의 측면지원과 함께 대기업에서 해외 유통망 개척과 배급을 맡아주는 종적연합도 필요하다. 특히 밉TV·밉콤·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애님월드 등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마켓에서 세계 각국의 바이어를 상대로 우리 만화의 수주상담을 벌이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수출 노하우를 배제할 수 없다.

 업계 일각에서는 풀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B29엔터테인먼트 강부환 이사는 『극장용 장편영화의 경우 미국과 일본의 장벽을 넘기 힘든 반면 3D 애니메이션은 빠른 시일 내에 세계 수준과 어깨를 겨룰 가능성이 높은 분야』라고 말한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정부가 문화를 중요한 수출품목으로 인식하고 창작 애니메이션 진흥을 위해 전면에 나선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특히 문화관광부가 지난해 10월부터 국산 만화영화의 TV 의무상영 비율을 25%로 책정하고 이를 올해 35%, 내년 45%로 상향조정한 것은 획기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올해는 애니메이션 전문 시나리오 작가 및 감독 육성과 공익자금 조성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외형적 조건으로 볼 때 애니메이션만큼 규모의 경제성을 갖춘 산업도 드물다. 게다가 만화영화의 수출은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전령사가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세계시장으로 포문을 연 우리 애니메이션업계가 올해는 든든한 수출발판을 마련할 수 있도록 업계와 정부, 그리고 투자자들의 공조체제가 시급하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