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컴퓨터까지
진공관 라디오가 본격 생산된 1920년 전후부터 미국의 TV방송들이 일제히 컬러방송을 실시한 1954년까지 약 35년 동안은 세계 전자산업이 백화난만(百花爛漫)을 맞은 때였다. TV와 컴퓨터를 비롯해서 VTR·전자시계·냉장고·세탁기 등 오늘날 전자산업의 중심을 이루는 주요 전자기기의 기술과 제품 개념이 이 시기에 윤곽을 드러냈다. 그 이전에 진공관이나 브라운관 등 전자관 기술이 완성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910년 이전에 완성된 진공관 기술은 1920년대 들어 신천지가 속속들이 드러나듯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고 밀도 있게 적용되고 있었다. 라디오는 완성 전자제품으로서 진공관이 피워낸 첫번째 꽃이었다. 이후 진공관은 여러 분야에 대해 실용적 적용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후 마침내 세계 전자산업계를 뒤흔든 두가지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났다.
첫번째는 1934년 영국 EMI사의 I 쇤베르크가 실용적 수준의 진공관 흑백TV개발에 성공한 사건이었다. 독일의 플렌스부르크(Flensburg)방송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중계를 앞두고 1935년부터 여기에 맞춰 최초의 정규 TV방송을 실시했다. 두번째 성과는 1946년 미국 육군탄도연구소의 프로젝트를 통해 얻어졌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원이었던 J P 에커트와 J W 모클리가 진공관 컴퓨터 에니악(ENIAC)을 완성한 것이다.
TV와 컴퓨터의 등장은 이제까지 선보였던 모든 전자기기와 기술들을 통합하는 종합 전자기기의 출현을 의미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두 기기의 출현은 다양한 파생분야로 확대 발전, 즉 전자분야가 독자적인 산업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EMI·CBS·RCA·GE·소니 등 가전회사와 IBM·유니시스 등 반도체·컴퓨터회사들이 기업적 토대를 마련한 것도 바로 이 시기가 된다.
진공관 TV는 영국의 J L 베어드가 만든 기계식 TV에 진공관을 가미한 것이었다. 1924년 베어드는 자신의 TV기구를 이용해서 십자가 모양의 이미지를 3야드 밖으로 전송하는 데 성공했다. 베어드의 TV를 개량한 미국의 C F 젠킨스는 1927년 워싱턴-뉴저지-뉴욕을 연결하는 중장거리 공간에서 영상전송에 성공했다. 상무장관 후버의 짤막한 축하메시지를 전송한 것이 영상의 전부였지만 이 사건은 당시 전자기술과 TV의 미래에 거는 인간의 기대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줬다. 이 사건을 보도한 같은해 4월 8일자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 제목은 TV에 대한 당시의 외경스러움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며 보이기까지 하다-마치 살아 움직이는 사진처럼(Far off speakers seen as well as heard here-Like a photo come to life).」
1928년 독일의 A 카를로스는 기계적 상주사(像走査) 방식의 니프코프 원판을 사용하여 주사선 48∼96개의 한층 개량된 기계식 TV를 고안해냈다. 상주사란 소용돌이 형태로 된 24개의 작은 구멍이 뚫린 원판(니프코프 원판)에 이미지를 광학적으로 투영해 주면 수신측에서 빛의 강약을 구분하여 이것을 복원(동기화)해 내는 방식으로서 1884년 독일의 P 니프코프에 의해 개발됐다.
EMI의 첫 실용화 TV는 음극선관(브라운관) 오실로스코프에 의한 2 대 1 비월주사(飛越走査 : Interlace)방식을 채택하고 주사선수 405개, 필드수 50개를 구현함으로써 기계식 TV에 비해 월등한 해상도를 실현했다. 1897년 K F 브라운이 발명한 음극선관 오실로스코프는 상주사방식을 전기방식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EMI는 이때 정규 TV방송을 위한 카메라 튜브도 함께 개발해냈다.
진공관 컬러TV는 1940년 미국 CBS의 엔지니어 P 골드마크에 의해 완성돼 뉴욕에서 실험방송에 성공했다. 이 TV는 송신측과 수신측이 회전 색필터를 이용해서 컬러 영상을 생성해내는 필드순차(CBS)식으로 설계됐고 흑백TV와 마찬가지로 6㎒의 전송 대역폭과 405개의 주사선을 갖고 있었다. CBS식은 1950년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에 의해 표준으로 채택됐다.
그러나 CBS식의 채택은 기존에 보급된 9백만대의 흑백TV가 무용지물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기존 흑백TV와의 양립성(컬러방송을 흑백TV와 컬러TV로 동시 시청할 수 있는 성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CBS식에 가장 반대하던 곳은 라이벌이던 NBC방송을 자회사로 두고 있던 RCA였다. RCA는 법정소송 등 지연작전 끝에 흑백TV와 동시 시청할 수 있는 컬러TV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953년 미국TV방송규격심의회(NTSC : National Televi
sion System Committee)는 RCA가 개발한 컬러TV방식을 NTSC방식이라는 이름으로 FCC에 제안하여 표준승인을 받아냈다. 마침내 이듬해인 1954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의 컬러TV방송이 NTSC방식으로 첫 전파를 탔다.
NTSC방식은 흑백TV와의 양립성이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전송로에서 발생하는 찌그러짐 현상 때문에 컬러의 색상과 채도가 쉽게 변질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찌그러짐 현상을 보완하기 위해 유럽대륙에서는 새로운 컬러TV방식들이 고안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PAL(Phase Alternation Line)방식, 그리고 프랑스와 구소련의 SECAM(Sequencial a Memoire) 등이다.
TV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TV신호 자기기록재생장치 즉 VTR(Video Tape Recorder)다. TV신호를 기록하려는 시도는 1920년대 중반 J L 베어드가 미디어로서 레코드를 이용한 것이 처음이다. 1950년부터 미국과 영국에서는 TV신호를 음성처럼 자기(磁氣)장치에 기록하기 위한 연구가 시작됐고 그 결과 1956년 암벡스가 세계 최초의 회전 4헤드형 VTR 개발에 성공했다. 컬러 신호를 직접 기록 재생할 수 있는 VTR는 1961년에 출현했다.
한편 1946년 진공관컴퓨터 에니악의 등장은 라디오와 TV 등 가정용 전자기기 위주의 전자기술이 산업용 전자기기 개발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에니악은 산업용 전자기기답게 그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에니악에 대해 그 외형이 집채만 했느니, 트럭 몇 대분이었느니 하는 식으로 표현했지만 이 컴퓨터가 갖는 의미는 그런 단순비교법으로 설명할 바가 아니었다. 이 컴퓨터가 탄생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자료에 따르면 에니악에는 1만8천개의 진공관, 7천개의 저항기, 1천개의 콘덴서, 6천개의 스위치 등이 내장됐으며 소요전력은 1백40㎾, 총하중은 30톤이었다. 이에 반해 당시 생산된 흑백TV는 고작 5∼15개 정도의 진공관을 채택하고 있었고 소비전력 역시 1백W 내외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에니악이 갖는 산업 연관효과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에니악이 나오기까지 발달과정을 보면 연산·기억·프로그램제어의 개념을 가진 현대식 계산기로는 1833년 영국의 C 바베지가 고안한 순차제어방식의 기계식 계산기가 그 원조다. 1877년에는 미국의 H 홀러리스가 인구통계를 위해 기계식 통계기와 함께 데이터의 입력을 위한 전기식 천공카드시스템(PCS : Punch Card System)을 발명해냈다. 홀러리스 PCS를 제조하기 위해 생겨난 회사가 CTR사인데 1924년 이 회사의 이름을 IBM으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19년에는 미국의 W H 에클레스와 F W 조던이 오늘날 컴퓨터회로의 기본이 된 2진법 기반의 플립플롭(Flip-flop)회로를 완성했다. 플립플롭회로와 진공관이 결합된 것은 1939년 오하이오주립대학의 연구원 J V 아타나소프에 의해서였다. 그는 2진법으로 4칙 연산을 할 수 있는 진공관 논리회로를 내장한 컴퓨터 프로토타이프를 완성하기도 했다. 1944년에는 하버드대학과 IBM이 바베지의 기계식 계산기를 전기식으로 바꾼 「하바드 마크Ⅰ」을 제작했다. 마크Ⅰ은 수의 기억과 가감산은 기계식이었으나 정보의 흐름 자체는 전기신호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에니악이 발표된 1946년에는 오늘날 컴퓨터설계의 바이블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J L 폰 노이만의 「전자계산기의 이론설계 서론」이 발표됐다. 폰 노이만은 이 저서에서 프로그램 내장방식의 컴퓨터설계를 처음 제창했다. 프로그램 내장방식의 컴퓨터는 1949년 케임브리지대학의 M V 윌크스가 개발한 EDSAC이 처음이다. 1951년에는 에커트-모클리사(유니시스의 전신)가 최초의 상용컴퓨터 「유니백Ⅰ」을 발표했다. 이때까지 컴퓨터들은 주로 군사목적이나 정부기관용으로 제한돼 있었다.
유니백Ⅰ 이후 MIT대학·펜실베이니아대학·케임브리지대학·일리노이대학·프린스턴대학 등과 IBM·에커트-모클리·레밍턴랜드·스페리랜드·ERA·벨연구소 등 기업들이 새로운 컴퓨터 개발에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까지의 연구개발 결과물들을 제1세대 컴퓨터 또는 진공관컴퓨터 세대라고 한다. 제1세대 컴퓨터의 최고 걸작은 1954년 IBM이 발표한 「IBM 704」. 이 컴퓨터는 부동소수점 연산장치와 레지스터를 갖춘 진정한 의미의 과학기술용 시스템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프로그래밍언어 포트랜도 이 컴퓨터를 통해 처음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