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방송의 개국
일반인에게 전자기기의 개념과 속성을 처음으로 전해준 것이 라디오다. TV와 컴퓨터가 본격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라디오는 우리나라 전자기기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세계 역사에서 보듯 각국에서 라디오 방송국의 개국은 그 나라 전자산업의 진원(震源)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첫 방송국인 경성방송이 개국한 것은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듯이 1927년 2월 16일, 서울 정동 1의 10에서였다. 라디오 방송이라는 신문명이 일본에 처음 전파된 것은 이보다 2년 앞선 1925년이었다. 이해 3월 22일 일본은 도쿄방송국, 7월 15일 나고야방송국 그리고 이듬해 12월 1일 오사카방송국 등 이른바 3개 방송국을 잇따라 개국시켰다.
3개 방송국의 개국은 당시 일본 3대 도시에 하나씩 장거리 방송시설을 설치한다는 일본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고 운영주체 모두 공익법인 형태라는 조건으로 설립인가가 났다. 3개 방송국의 공통점은 출자자가 민간인이었고 외형상으로도 민영이었지만 사실은 일본정부가 적극적 통제를 가하는 준(準)관영이나 다름없었다.
시바우라제작소(芝浦製作所)가 대주주였던 도쿄방송의 경우 1922년부터 「방송무선전신사업」에 대한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설립인가가 난 것은 1924년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정부가 처음에는 방송이 갖는 「특별한」 영향력을 미처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일본정부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이후 이른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폭동」 등 집단행동을 통제할 수단으로 방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었다.
경성방송의 탄생은 이를테면 관동대지진 이후 체감했던 도쿄방송국의 효용성을 한반도 식민지 경영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방송 개국의 역사는 곧 전자산업의 발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1925년 이전, 미국·영국·독일·프랑스 하물며 일본조차 자국내 라디오 방송의 개국과 함께 전자산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경성방송의 개국은 적어도 이같은 산업적 효과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경성방송 청취용 라디오수신기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까지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하고 거의 전량을 일제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성방송의 개국은 초창기 전자기기의 대명사였던 라디오의 도입 역사를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작으나마 의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로서는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던 고가의 방송장비들이 국내에 첫선을 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경성방송의 개국은 적지 않은 시간적 간극이 있긴 하지만 1959년 금성사의 진공관식 라디오 생산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전자산업 태동과 간단치 않게 줄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경성방송의 개국에 앞서 1924년 11월 총독부 체신국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던 미스코시포목점(三越吳服店, 현 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미국제 송수신기를 설치하고 오사카로부터 송출된 500W출력의 시험전파를 수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공에 고무된 체신국은 보름 후 구내 무선실험실에서 주파수 750㎑, 출력 50W로 방송전파를 발사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첫 방송기록이다.
이듬해인 1925년 4월에는 조선일보사가 민간방송국 설립을 위한 시험방송을 실시, 전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다. 조선일보사는 1925년 서울 수표교(水標橋)부근 한옥에서 홑이불을 치고 마이크를 설치한 간이 방송실을 통해 첫 시험방송을 내보냈다. 이 시험방송은 라디오수신기가 설치된 서울시내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 현 상공회의소 자리)과 우미관 극장(관철동 부근) 등 두 곳에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실시한 공개 형식이었다.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여기자 최은희(崔恩喜)가 사회를 보고 월남 이상재(李商在, 당시 조선일보 사장)의 인사말로 시작된 시험방송은 서울에 이어 인천·수원·개성·영등포 등지에서 잇따라 실시돼 전국적으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국민들이 방송의 신기함에 흠뻑 빠졌을 뿐 아니라 라디오수신기에 대한 소유 욕구를 한층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방송국 설립시도는 조선총독부의 민간방송국 불허 방침에 막혀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총독부는 사설방송 설치자에 대한 법규정인 무선법 제16조를 들었다. 당시의 무선전신법은 무선전신과 무선전화는 정부(일본)가 관장한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1926년 11월 일본인 8명과 조선인 이용문(李容汶)·방태영(方台榮)·김한규(金漢圭) 등 총 11명이 공동출자해서 설립된 사단법인 경성방송국도 사실은 이같은 무선전신법 조항을 어긴 것이었다. 그러나 경성방송국은 사단법인체의 구성을 총독부에 일임하는 등 스스로 총독부의 통제하에 들어감으로써 「불법」을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1927년 2월 16일 개국한 경성방송은 호출부호 JODK, 호출명칭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주파수 690㎑, 출력은 1㎾였다. 방송장비로는 영국 마르코니사(무선전신을 발명한 이탈리아인 마르코니가 런던에 세운 무선기기제조 겸 방송사, 나중에 BBC방송 탄생의 모체가 됨)가 제작한 6Q형 방송송신기와 15㎾급 변압기 4대, 14㎾급 충전용 전동발전기 3대, 6㎾급 송신기용 전동교류발전기 2대 등이었다. 마이크로폰은 마르코니사의 전자유도형 마그네트폰 송화기 2대를 도입했다.
경성방송국은 하루 17시간(오전 6시∼밤 11시) 동안 일본어방송과 조선어방송을 7 대 3의 비율로 섞어 내보내는 기형적인 편성방침을 고집함으로써 조선인과 일본인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초창기 경성방송국은 청취자들로부터 월 2원(圓)씩 징수하는 수신료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청취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라디오의 보급률이 감소하더니 급기야 극심한 경영난에 빠지고 말았다. 실제로 개국 당시 1440대(조선인 보유대수는 275대)이던 라디오가 그해 연말 5260대로 증가하긴 했으나 이후 증가세가 둔화돼 5년 후인 1931년까지도 고작 1만4000여대에 머무르는 답보상태가 계속됐다.
라디오수신기 보급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사단법인 경성방송이 확대 개편된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가 1933년 4월부터 900㎑의 경성 제1방송(일본어)과 610㎑의 경성 제2방송(조선어)으로 분리하는 2중 방송을 실시하면서 부터였다. 이를 위해 조선방송협회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서세교리(현 서울시 연희동)에 10㎾급 연희송신소를 세웠다. 이때 들여온 10㎾급 2중 방송장비는 동경전기주식회사가 처음으로 국산화했다 해서 일본 내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던 것이었다. 2중 방송의 실시와 출력이 높아지면서 라디오 보급은 1937년에 이르러 10만대을 돌파했다. 이해 경성방송은 제2방송의 출력을 다시 50㎾로 확장했다.
이에 앞서 1935년 경성방송국의 호출명칭이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변경됐는데 이는 같은 해 개국한 부산방송국을 필두로 청진·평양(1936년), 이리(1937년), 함흥(1938년) 등 지방방송국이 잇따라 설치되는 데 따른 것이었다. 이후 해방 때까지 대구(1940년), 광주(1941년), 대전·목포(1942년), 원산·해주·마산·성진(1943년), 춘천(1944년), 제주(1945년) 등 10개 도시에 지방방송국이 추가로 개국했고 강릉·서산·고성·개성 등에 간이 방송소가 설치됐다.
지방방송국의 설치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연희송신소의 10∼50㎾급 출력만으로는 전국적인 라디오 수신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소규모 출력(50∼500W급)이나마 지방방송국의 개국을 서두른 것이었다. 또 하나는 보급된 라디오의 대부분은 수도권 인근에서나 겨우 청취할 수 있는 감도 수준의 광석(鑛石)수신기였으며 그나마 고급 전지를 사용하는 고성능 진공관식은 서울지역에 극히 소수만이 보급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당시 보급된 2∼5구식 진공관 라디오는 물론 광석수신기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군수용 중전기 분야와 달리, 라디오 분야는 국내에서 자체 제작여건이 전혀 갖춰지지 못한 데다 일본 라디오제조업체들의 진출이 단 한건도 없었던 탓이었다. 다만 1930년대 후반 백열전구를 판매하던 조광운(曺光云, 현 광운대학교 설립자)의 광운상회가 라디오제조회사인 일본무선기기사의 대리점을 개설하여 광석수신기를 취급하던 중 일제부품을 들여와 라디오를 조립했다는 기록은 있다.
한편 경성방송이 일본어·조선어 2중 방송을 실시하면서 가장 곤욕을 치렀던 것은 방송자료의 절대 빈곤이었다. 당시 재방송용 자료로 사용됐던 것은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레코드판뿐이었다. 경성방송에 방송자료를 직접 녹음할 수 있는 녹음기가 도입된 것은 1939년의 일이었다.
이때 도입된 녹음기는 일본화학연구소가 제작한 명반석(Alumite) 원반을 이용해서 만든 기계식이었다. 1940년에는 일본자기녹음연구소가 개발한 자기식(磁氣式) 녹음기가 선을 보였다. 당시 자기식 녹음기는 녹음선의 삭제를 통해 여러 번 반복 사용할 수 있는 데다 녹음 즉시 재생이 가능한 혁신적인 신발명품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음질이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후 결점들을 보완한 녹음매체로서 인조수지(人造樹脂) 녹음반, 알루미늄 도장(塗裝) 녹음반 등이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