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 동호회 "사이버 커뮤니티", 파워그룹으로 부상

 PC통신 동호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사이버 커뮤니티가 현실세계를 움직이는 오피니언 리더그룹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언뜻 현실과는 유리된 공간처럼 보인다. 기성세대 중엔 사이버 펑크 문화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대변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통신이나 인터넷에 빠져 현실감각을 잃어버리는 사이버 펑크족들은 극소수다.

 실제로 가상공간은 현실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온라인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오프라인의 세계를 향해 문제를 제기한다. 초창기엔 동호회 게시판과 대화방에서 개인적인 의견을 주고받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젠 대기업의 부당한 요금정책에 반기를 드는가 하면 품질과 서비스 개선을 요구하는 등 다양한 슬로건으로 소비자운동을 주도하는 파워그룹으로 부상했다.

 PC통신 동호회가 이처럼 강력한 온라인 커뮤니티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외형적으로 거대조직이 됐기 때문이다. 현재 천리안·하이텔·유니텔·나우누리 4대 PC통신 동호회를 합치면 1500개가 넘는다. 이들 동호회는 적게는 수십명에서부터 많게는 수만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하이텔 「OS동호회」의 경우 무려 5만명, 「하드웨어 동호회」와 「노트북 사용자모임」도 각각 2만8000명과 1만8000명이나 된다. 천리안 「초보자의 뜰」, 유니텔의 「게임마니아」 「프로그램 개발자모임」 등도 모두 2만명을 웃도는 매머드 동호회다. 국내 PC통신 동호회원 숫자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지만 업계에서는 약 70만명 선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PC통신 중심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압력단체로 등장한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이텔 커뮤니케이션팀 이상규 과장은 『국내 PC통신 동호회 규모는 정보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을 오히려 앞선다』고 밝히며 『이제는 친목이나 취미활동을 넘어서 여론을 만들어가는 사이버단체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PC통신 동호회는 최근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이끌어냄으로써 이같은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하고 있다. 특히 활동이 두드러진 곳은 컴퓨터와 통신관련 동호회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98」 가격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선 하이텔 「OS동호회(OSC)」가 대표적인 경우다. OSC는 MS사가 독점적인 지위를 바탕으로 폭리를 취해왔다고 주장하면서 적정 수준으로 윈도98 가격이 인하되기 전까지 불매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선언했다. OSC 회원들은 용산 컴퓨터상우회와 연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MS 독과점 횡포 규탄 궐기대회」를 준비하는 등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매킨토시 동호회도 올초 일본 현지보다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애플코리아의 「i맥」 불매운동을 벌였고 이는 i맥의 판매에 지장을 초래했다. 통신관련 동호회도 소비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고 있다. 나우누리의 경우 「이동전화 사용자모임」을 비롯, 「기가헤르쯔」 「내마음을 울리는 삐삐」 등이 서비스 품질과 요금인하를 주장, 휴대폰 사용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들은 이동통신업체들의 불공정 거래 및 부당요금 징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소비자 권익보호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컴퓨터와 통신 동호회의 품질평가는 업계의 신제품 개발방향과 마케팅 전략수립에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하이텔 하드웨어 동호회는 삼성전자와 LG전자로 하여금 소비자 대상의 비교평가회를 열도록 제안해 모니터 평면논쟁을 잠재우기도 했다. 컴퓨터업체 S사의 한 관계자는 『신제품 출시 전에 관련 동호회의 핵심멤버들에게 벤치마크를 의뢰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몇몇 동호회의 공동구매 제품으로 선정되거나 대화방에서 좋은 평가를 얻을 경우 자연스러운 홍보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한다.

 컴퓨터와 통신관련 동호회 이외에도 종교부터 문화예술·게임·외국어·레저/스포츠·학술 등 전 분야에 걸쳐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곳이 많다. 유니텔 영화동호회 「씨네시타」는 충무로 영화제작자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영화흥행에 영향을 미치는 마니아그룹이다. 지난 97년 영화 「에비타」 관람료를 7000원으로 올리려는 S사의 시도를 저지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시네시타를 비롯, 영화동호회 회원들이 일단 재미있다는 평가를 내려 입소문이 나게 되면 젊은층 관객에게는 영화평론가들의 호평보다 훨씬 파급효과가 크다. 홍보대행사 아트로드의 김민지 사장은 『작품성과 재미는 뛰어나지만 주연배우의 지명도가 낮을 경우 개봉에 앞서 각 PC통신사의 영화동호회 대상의 릴레이 시사회를 열면 관객동원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수준높은 동호회 운영의 모델을 제시하는 곳으로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어학동호회도 빼놓을 수 없다. 1400명이 모인 천리안 「중국어동호회」의 경우 대만대표부 외교관이 대표시솝을 맡아 지역별 중국어 강좌를 진행하는가 하면 중국문화 기행 등의 행사를 통해 문화교류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관련, 천리안 커뮤니티팀 황성도 과장은 『동호회는 단순한 아마추어들의 모임이 아니라 전문가 집단으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어학동호회가 유학생과 현지인을 연결해 준다거나 바둑·장기 동호회가 자체적으로 급수 인증시스템을 갖추는 등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

 유니텔 홍보실 정혜림씨는 『동호회 활동의 또 다른 경향은 오프라인 활동을 통해 사회 전반의 문화를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4년째 정기공연을 갖고 있는 유니텔 「연극동호회」가 최근 「조만득씨」라는 작품에서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훌륭한 무대를 보여준 것은 그 좋은 예다. 동호회가 주최하는 가슴 훈훈한 이벤트들도 늘어나고 있다. 일반인과 장애자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수화교육과 PC 기증운동을 벌여온 천리안 「수화사랑동호회」를 비롯, 등반객 사진찍기와 요술풍선 판매 같은 이벤트로 수익금 전액을 IMF 실직자 돕기에 보탠 「사진동호회」 「레크리에이션동호회」가 PC통신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온라인 동호회가 오프라인의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때로 동호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소비자 전체의 권익을 위한 경우가 더 많다. 국산SW 구매운동이라든가 스크린 쿼터 반대운동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던 대표적인 사례다. 또 천리안 「독도사랑동호회」의 한·일 어업협정 규탄운동, 「주부동호회」와 「도시환경동호회」가 함께 벌인 영월 동강댐 건설 반대운동도 호응이 컸다.

 동호회는 이제 온라인 커뮤티니의 대표집단으로서 건전한 비판과 감시기능을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그 개선을 위해 힘을 규합하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영향력이 커진만큼 동호회의 역기능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몇몇 컴퓨터 동호회가 공동구매 과정에서 협찬금을 요구했다거나 어학동호회가 특정학원과 결탁했다는 등 PC통신가에 가끔 나도는 구설수들은 동호회의 방향정립을 위해 보다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파워그룹으로서 동호회의 역할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