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7);제 1부 혁명전야 (6)

전기공업의 발흥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은 전자산업 발전사 측면에서도 큰 전환기를 맞는 계기가 됐다. 해방에서부터 1950년대 말까지 약 15년 동안 정치적·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1948년 정부수립, 좌우(左右)대립에 이은 한국전쟁의 발발, 자유당 정권의 독재 등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꿔놓은 대사건들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경제분야에서만큼은 이렇다 할 발전이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각종 국민계정에 대한 통계가 시작된 1953년 우리나라 1인당 GNP(1975년 불변가격)는 67달러였는데 전자산업이 태동한 이듬해인 1960년은 79달러였다. 7년 동안 경제성장은 고작 18%를 기록한 셈이었다. 이에 반해 1961년부터 1968년까지 7년 동안은 81달러에서 169달러, 그러니까 그 증가율이 110%에 이르는 고성장을 구가하게 된다.

 결과론이겠지만 한국의 전자산업이 해방 후 15년이나 지난 1959년에서야 태동한 것도 바로 경제발전의 낙후성과 정체현상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전기전자제품, 이를테면 라디오·TV·냉장고·선풍기·전자식 전화기 등은 생활의 필수품이 아니었다. 사실 라디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전기전자제품들은 극소수 부유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사치품들이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일본과 미국에서 들여온 것들이어서 관련산업이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전자산업이 일찍 태동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전기의 공급 부족을 들 수 있다. 해방 직후 한반도의 총 발전량은 146만7000㎾로서 당시 상황으로서는 그럭저럭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의 이른바 5·14 단전조치 이후 발전시설의 대부분이 북쪽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남한의 전력수급량은 전체 14%인 20만6000㎾ 밖에 안됐다. 그나마도 실제 공급량을 뜻하는 평균전력은 연간 8만㎾에 불과해서 공장용은 물론이거니와 일반가정용 전기의 태부족 사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해방 50주년이 되는 지난 1995년의 평균전력이 2108만㎾에 이르렀으니 50년 만에 전력수급량은 무려 260여배가 증가한 셈이다.

 하지만 이같은 악조건에서도 전자산업 태동을 위한 여러가지 움직임들은 있었다. 바로 전기공업(통신공업 포함)의 계획적인 육성과 통신기기의 보급 확대 그리고 민간방송국의 잇따른 개국이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산업분류에서 전기공업은 전자기기와 통신기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예컨대 전기공업은 크게 강전(强電)과 약전(弱電)으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약전에 해당되는 분야가 바로 전자와 통신기기였다. 강전 역시 발전설비와 산업용 전기기기를 포함하는 중전(重電)과 냉장고·세탁기 등 가정용 전기기기와 조명기기 등을 포함하는 경전(輕電)으로 나눠졌다. 그러니까 195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에서 서서히 사용되기 시작한 전자산업은 약전과 가정용 전기기기가 하나의 범주에 묶여져서 생겨난 신흥 산업분야였던 것이다.

 해방 후 가장 활발했던 전기공업분야는 전구·전선·전지·변압기·전동기 등 강전과 일부 중전기기 품목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발족된 상공부 전기국(電氣局)은 전기공업 육성을 위한 법률안을 마련하는 등 관련산업 육성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간기업들의 단합과 품질향상을 위한 전기업공업통제협회(1962년 출범한 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의 전신)의 출범을 유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상공부의 전신인 미군정청 상무부는 1945년 9월 광공국장(鑛工局長) 언더우드 대령의 감독 아래 해방 전 일본인들이 설립했던 적산(敵産)기업들을 인수 운영할 한국인 관리자들이 선임하고 공장을 운영할 발전설비와 수배전(受配電)설비의 점검에 나서는 등 산업기반을 닦는 데 기여했다.

 상공부가 1948년 12월 미군정청 상무부로부터 넘겨받은 전기공업분야 직할 관리기업들은 모두 20개사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수십여개의 소규모 기업들이 있긴 했지만 그 규모나 역할로 볼 때 이들 20개사는 사실상 한국의 전기공업을 대표하던 기업들이었다. 이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회사는 인천에 생산공장이 있던 조선도시바전업(朝鮮東芝電業)이었다. 전동기와 변압기 등을 생산하던 이 회사는 해방 후 회사이름을 조선도시바전기로 바꾸고 초대 관리인으로 시인(詩人)이자 신문기자 출신인 주요한(朱耀翰, 4·19 직후 부흥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 역임)을 선임하기도 했다.

 조선도시바전기는 1950년 서상록(徐相錄, 전 이천전기 회장)이 불하받아 이천전기공업(利川電氣工業)이 됐다. 이천전기는 최근 삼성전기에 매각됐다가 다시 일진중공업에 합병됐다. 서상록은 해방 전부터 일본에 나고야이천공업을 비롯, 이천방직 등 3∼4개나 되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재력가였다.

 나머지 19개의 회사들도 대개는 이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정부수립과 함께 민간인에 불하되었다. 당시 20개 전기공업 관련업체들의 현황은 <별표>와 같다. 민간에 불하되기까지 적산기업들은 사장격인 관리인 이외에도 공장장격인 기술담당을 따로 두고 있었는데 기술담당 출신으로서 유명해진 사람 가운데 하나가 1965년 오리온전기를 창업한 이근배(李根培)다. 이근배는 1945년부터 1948년 11월까지 조선변압기제작소의 기술주임과 공장장에 이어 1948년부터는 조선도시바전기로 옮겼다. 1955년에는 동서지간인 성두현(成斗鉉)이 설립한 형광등제조업체 신광기업(信光企業)으로 자리를 옮겨 오리온전기 창업수업을 쌓았다.

 적산기업의 관리운영이 한창일 때 우리 자본에 의한 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1946년에 들어 맨 처음 광주의 심만택(沈萬澤)이 호남전기공업(湖南電氣工業, 현 로케트전기)을 일으켰다. 이어 명도원(明道元)이 전차전동기용 권선(捲線)전문 건전사(建電社), 강경식(康璟植)이 변압기제작과 수리전문회사를 내세운 국제전기주식회사, 조계철(趙季喆)이 주상변압기를 생산하는 한광전기주식회사(韓光電氣株式會社)를 각각 설립했다.

 1947년에는 정낙은(鄭樂殷)과 홍순복(洪淳復)이 축전지전문 조선축전지주식회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1950년의 한국전쟁은 그나마 근근이 이어지던 남한내 전력수급량을 20% 수준으로 떨어뜨렸는가 하면 적지 않은 전기공업 시설들을 파괴시켰다. 전쟁기간 중 전력사정이 악화되자 심지어는 동해와 황해상에 떠 있던 미군소속의 화이트 호스(White Horse)호(號) 및 임피던스(Impedence)호 등 발전함(發電艦)의 신세를 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피폐된 전기공업시설의 복구는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기존 업체의 재건 형태로 이뤄졌다. 전기공업분야의 재건운동은 1950년대 말까지 계속돼 그 자체로서 전후(戰後) 암울했던 사회 전반에 희망의 빛을 밝혀주는 역할까지 했다.

 한편 1950년대의 전기공업은 미래를 밝혀주고 이끌 최첨단기술 분야로서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직업 제1순위였다. 각종 전기학교가 육성되였으며 대한전선·이천전기 등 유명 업체들의 입사시험에 대졸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이천전기는 전기공업분야에 대한 학생들의 인기가 절정으로 치닫자 1958년 기업사상 초유의 대졸사원 공채시험을 실시하여 성가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기술과 고급인력의 태부족 현상이었다. 사실 해방 후 1950년대까지도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했거나 축적한 전기기술분야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전기관련 인력 역시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초급기술자나 단순 숙련공에 불과했다. 생산시설은 있었지만 이를 가동할 능력이나 기술이 없었다. 일본 기업인들은 패전 후 제품 설계도면을 소각해 버리거나 원본을 가지고 철수해 버렸다. 설계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읽어낼 기술자가 없었다. 자재난도 심각해서 변압기나 전동기의 경우 규소강판 대신 철판을 사용함으로써 걸핏하면 터지고 새는 일이 많아 국산 전기제품들에 대한 불신풍조는 극에 달했다.

 이같은 악조건에서도 나름대로의 기술개발과 국산화 소식이 들려온 것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이천전기의 경우 고급 인력의 수혈과 함께 미국 국제협력국(ICA)의 차관으로 현대식 생산시설을 마련하고 자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5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22㎸급 변압기와 370㎸급 전동기를 자체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앞서 창업 2년째인 신생 이화전공사(二和電工舍)는 1958년 고효율의 자동전압조정기를 자체 개발해내기도 했다. 이화전공사는 특히 창업주 배수윤(裵壽潤)이 체신부에서 무선전신전화건설국 기사로 근무하던 중 자동전압조정기의 필요성을 느껴오던 터에 미국산 조정기를 역분석하는 방법으로 기술을 터득하여 국산제품을 개발해낸 것이었다.

 이화전공사의 자동전압조정기는 이듬해인 1959년 상공부가 주최한 제1회 발명품전시회에서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하여 그 개발과정과 의의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같은 사례는 1960년대 전자산업의 발전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