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밥통」이 깨지고 있다. IMF 한파가 몰아치면서 지난 수십년간 관료사회와 더불어 가장 안정적인 직장으로 여겨졌던 공기업의 철밥통 신화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리고 있다.
한국통신과 한국전력은 한국을 대표하는 공기업. 규모나 수익, 업무성격 등 어느모로 보나 마이너스 성장 혹은 감원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곳으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이 거대 공룡조직이 민간기업보다 혹독하게 제살을 깎는 「몸집 줄이기」를 단행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외통수 수순」이다.
공기업 사상 전 사업분야가 완전 경쟁체제에 노출된 한국통신은 날고 기는 민간기업과 대항하기 위해 생산성과 효율성, 나아가 조직의 새바람을 겨냥한 인력조직 감축이 불가피했다.
경쟁자는 아직 없지만 발전·송전·배전을 부문별로 떼어내야 하는 한국전력 역시 경쟁력 확보와 수익성 극대화라는 대세를 외면해서는 더 이상 존립하기 어렵다.
한국통신과 한국전력은 보수적인 인사 분위기가 지배해왔지만 이제 보수성과 정체성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연공서열식 승진, 보직관리는 지난해와 올해를 거치면서 발탁, 파격인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물론 대대적인 인력감축이 뒤따랐다.
한국통신은 임원의 30%를 줄였고 전 간부의 3분의 1을 보직 변경했다. 주요 경영진에는 40대의 젊은 전략가들을 포진했다. 상대적으로 감원폭이 작은 한국전력은 주요 보직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한국통신의 경영혁신은 민간기업보다 고강도라는 점에서 국내 공기업 경영쇄신의 가늠자 역할을 한다. 일단 대규모 조직 및 인력 개편을 단행했고 이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전력은 부문별 민영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통신에 비해 가시적 성과는 처진다. 하지만 한전은 부문별 민영화에 돌입할 경우 또 한번 인사와 조직에 격변이 예상된다.
분명한 것은 철밥통 공기업인 한국통신과 한국전력이 과거의 안주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무한경쟁시대에서 공기업이라는 메리트는 사라졌다. 공기업도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에 내던져진 것이다.
<한국통신>
지난해 12월 17일 한국통신은 임원 30%, 직원 1만5000명을 감축하고 전체 간부진 3분의 1을 교체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계철 한국통신 사장은 이같은 구조조정 및 경영혁신작업을 당초목표인 2002년보다 2년 앞당긴 오는 2000년까지 마무리하고 2002년에는 외형 15조원, 당기순이익 1조원을 달성, 세계 10위권 통신사업자로 도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한국통신은 모든 사업분야에서 완전 경쟁체제에 노출된 국내 유일의 공기업』이라고 전제하고 『적자 한계사업 발생과 전통적인 수입원이었던 국제전화까지 적자가 예상되는 등 수익성이 날로 악화되고 있어 세계 10위권의 통신사업자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고강도의 충격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통신은 1만5000명 감축 외에도 오는 2000년까지 3400명을 직무전환을 통해 재배치할 계획이어서 인력 혁신 대상자는 모두 1만8000명에 이르게 된다. 한국통신은 이와 함께 기획조정실과 사업협력실을 통합하는 등 기존 7실 7본부 9단 176개팀에서 6실 5본부 6단 124개팀으로 재편했다. 또 기존 10개 지역본부를 전면 폐지하고 2단계 전화국 합리화도 추진, 전국 88개 광역전화국체제를 구축할 예정이다.
한국통신이 43명의 임원진 가운데 16명을 전격 퇴진시킨 것은 형식이나 내용 모두에서 충격적이다. 한국통신 창사 이래 이같은 규모로 임원이 한꺼번에 옷을 벗은 전례가 없고 후속인사 역시 파격의 연속이다. 중폭 이상의 구조조정과 인력감축이 예견되긴 했지만 실제로 밝혀진 내용은 그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당초 이사급 이상 전원 사표를 제출받을 때만 해도 선별 수리를 통한 물갈이론이 우세했다. 그러던 것이 최종적으로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퇴진자 확정으로 결판났다. 42년 이전 출생자, 즉 58세 이상 임원은 무조건 퇴임시킨다는 것이다. 능력이나 회사 공헌도 등을 고려, 심사를 통해 퇴직자를 솎아낼 수도 있었지만 이 경우 불공정 시비가 제기될 여지도 많아 고육지책으로 나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한통에서는 「목요일의 대학살」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런 기준은 명예퇴직자 접수에도 적용됐다. 직급을 무시한 채 근속연수 20년 이상인 직원에 대해 명퇴신청을 접수하고 있다. 한통 조직의 최대 약점이 노령화에 따른 임금부담이라는 점에서 현 경영진으로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한통이 내건 목표가 「인력구조 개혁을 통해 젊은 조직으로 거듭나기」라는 점에서 새롭게 부각되는 세력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통은 당시 인사를 계기로 그간의 연공서열 원칙이 철저히 파괴될 것임을 천명했다. 능력과 발탁인사가 줄을 이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미 그 단초는 정권교체 후 나타났다. 기조실장을 비롯, 핵심 포스트에 전략적 사고를 앞세운 40대 임원을 포진했다.
당시 인사로 이런 기조가 완전 정착됐다. 한국통신의 이번 인사는 결론적으로 「공채시대」의 개막이라고 할 수 있다.
1급 승진 1년차인 최안용 팀장이 업무이사로 승진한 것은 파격 그 자체다. 최 이사는 83년도에 입사한 공채 1기 출신으로 첫별을 달았다. 앞으로 있을 후속인사에서도 공채 출신들이 전화국장이나 본사 부장으로 대거 임명될 것으로 전망돼 한국통신의 주도세력이 공채 인물들로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능력 위주의 발탁인사도 관행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1급 승진 3년차인 박부권 공보팀장을 업무이사로 승진시켜 홍보실장을 맡긴 것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그간 한국통신을 지칭할 때 가장 흔하게 따라붙던 수식어는 「공룡」이었다. 공룡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멸종됐으나 한국통신은 이제 환경변화에 대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
<한국전력>
지난해 14조819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한국전력은 2만명의 정규직원과 계량기검침원 등을 포함해 모두 3만4000명의 직원을 보유한 세계 4위의 전력회사다.
전력을 공급하고 유지보수를 다루는 특성상 기능중심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크게 발전·송배전·판매 등의 기능으로 분류되는데 사장이하 판매 및 발전담당 부사장 등 각 1인씩 두고 있으며, 그 아래 4본부 5사업단으로 구성돼 각각 일반기업의 전무·상무급인 처장이 임원으로 기업경영의 책임을 맡고 있다.
한전의 직급은 일반기업의 직책과는 달리 8개의 사무직급으로 분류돼 직책을 표시한다. 일반적으로 기능직은 8급에서 시작해 보수반장 보수주임이 상한선으로 사무직군의 과급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7직급부터 시작되는 평직원(사무직)에서 과장으로 승진되는 연한은 보통 6년이나 최근 8∼10년으로 점차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과장승진인사에서는 시험(고시)평가와 함께 자력평가 조항을 삽입해 승진시 반영하도록 한 것이 일반기업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또 한전은 인사고과 및 임직원관리를 직계 상급자가 주관하는 일반기업과는 다소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4직급 이상 간부에 대해서는 사장이 직접관할하는 비중이 크며, 5직급부터 8직급까지는 부사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것도 일반기업과 차이를 보인다.
전문성이 각별하게 요구되는 공기업인 한전은 발전·송배전·판매 등 각 기능별 종사 직군간 배타성이 두드러진 조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전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일반기업의 부장과 이사급 직책의 중간정도인 사업소장 때부터 직군내부에서만 이뤄지던 인사를 타 직군간 이동인사로 전환, 조직융합을 꾀하고 있다.
한전은 전문성을 요하는 기업인 만큼 전문연구인력을 외부에서 특채하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 부분에서 의외로 약한 면을 보인다는 것이 내외부의 평가다.
평직원에서 출발하는 한국전력의 대부분 임직원들은 전무까지 승진하는 것을 한도로 보고 있다.
최근 2, 3년간 민간기업에서 사외이사제도를 활발히 도입하고 있으나 한전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도입해 발전시킨 것도 특징이다.
거대 공기업으로서 그 중요성을 고려해 일찍부터 경륜있는 민간전문가들을 사외이사로 선임해 조언을 듣는 일종의 경영견제 및 조언 장치를 두고 있는 셈이다.
사장은 임명직이 대부분으로 전임인 11대 이종훈 사장이 자체 승진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입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사실이다. 장영식 사장 전임인 이종훈 사장의 경우는 평직원에서 시작해 25년여 만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한전출신의 유명인사로는 2002년 월드컵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세직씨 정도가 거명된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