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8);제 1부 혁명전야 (7)

방송의 정착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왕 히로히토(明仁)의 떨리는 음성이 경성중앙방송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울려나오자 삼천리 방방곡곡은 이내 태극기로 물결을 쳤다. 라디오의 동시성과 속보성에 대한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방송이 탄생한 지 20여년 만의 일이었다. 물론 이때의 방송이란 천왕의 항복선언방송을 미리 녹음하기 위해 하루 전 음악방송을 모두 중단해야 했을 만큼 열악한 것이긴 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라디오방송은 경성중앙방송 외에 16개의 지방방송국이 있었는데 이남에는 부산·이리(현 익산)·대구·목포·광주·마산·대전·춘천·청주 등 9개, 이북에는 평양·청진·함흥·원산·해주·신의주·성진 등 7개가 분포돼 있었다. 이밖에 강릉·개성·장전·서산 등 4곳에 이동방송중계소 및 간이방송소가 더 있었다.

 라디오수신기는 일본인·한국인 포함해서 30만5000대가 보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한국인 소유는 전체 23% 수준인 7만여대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해방 2년째인 1947년 8월 말 한국인 소유 라디오가 18만5000대로 급증했다. 이는 일본인이 철수하면서 소유하던 중고 라디오를 한국인에게 팔았기 때문이었다.

 일제 때부터 1950년대 초까지 라디오의 보급을 전담한 곳은 조선방송협회라는 단체였다. 이 단체는 해방 전 총독부를 대신하여 보도통제나 전파감시와 같은 업무를 함께 관장했으나 해방 후 미군정청 공보부와 체신부에 관련업무를 넘겨준 후부터는 라디오수신기의 보급확대 등 방송청취 저변 확대에만 주력했다. 1946년 조선방송협회는 라디오수신기 보급확대책으로 조선전기산업주식회사라는 방계회사를 설립하고 라디오 보수와 핵심부품인 진공관 재생업무에 본격 나서기도 했다.

 이에 앞서 조선방송협회는 1944년 서울 정동 2번지의 협회건물 3층에 일본 와다진공관제작소(和田眞空管製作所)와 기술제휴로 월 5000개 규모의 진공관 재생공장을 설립했다.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일본으로부터 진공관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자구책 차원에서 직접 마련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이 공장은 1년여 동안 방치돼 있다가 조선전기의 출범과 함께 재가동됐다. 조선전기는 한동안 진공관만을 재생하다가 미군용 건전지 재생업무를 병행했고 1948년 이후 미국에서 라디오부품 도입이 원활해지면서부터는 수신기 수리도 함께 했다. 수리업무가 폭증하자 조선전기는 진공관만을 재생하는 범아전자공업(汎亞電子工業)을 설립하고 조선방송협회에 고성능 수은정류관(水銀整流管) 등을 납품케 했다. 그러나 범아전자는 한국전쟁 중 공장시설이 완전 파괴돼 폐업함으로써 전자산업의 태동은 꿈틀거림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라디오 신규 수요는 일제 라디오가 대부분이었다. 해방 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조선방송협회가 독점 판매한 일제 라디오는 단거리 수신용인 3구식(球式) 보급형 1호, 중거리 수신용 4구식 보급형 2호, 원거리 수신용 5구식 보급형 3호 등이었다. 이 결과 라디오 보급대수는 1950년 말 50만대를 넘어서고 있었다.

 방송내용의 질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47년 4월부터 서울중앙방송(1945년 9월 9일부터 수도 호칭이 경성에서 서울로 바뀜에 따라 경성중앙방송도 서울중앙방송으로 개칭함)은 프로그램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그램 사전심의제를 시행했다. 33회전 방식의 턴테이블 장비가 도입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유무선을 이용한 실황중계가 큰 화제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1945년 9월 9일 미군의 서울 입성식을 비롯, 같은 날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있었던 일본 항복조인식 등이 전화선을 통해 실황중계됐다. 이 해 10월에는 수원에서 열린 전국축구대회에 이어 이듬해 3월 1일에는 보신각 타종식이 전국에 중계돼 광복의 기쁨을 새삼 만끽하기도 했다. 1948년에는 런던 하계올림픽 대회소식을 인도방송을 경유, 영국BBC방송의 단파를 이용하여 안방에 전달함으로써 최초의 해외중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47년 9월 3일은 우리나라 방송사에 영원히 기록될 만한 역사적인 뉴스가 타전된 날이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리고 있던 국제무선통신회의에서 한국에 호출부호 「HL」을 할당하기로 의결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 1일부터 서울중앙방송의 호출부호가 일본식 JODK에서 HLKA로 바뀌게 됐다. 나머지 지방방송들도 모두 HL××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해방 후 비로소 2년여 만에 실현된 전파주권의 획득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방송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첫 통과의례의 의미이기도 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과 함께 정부는 서울중앙방송과 10개 지방방송을 새로 만들어진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영방송체계로 개편하고 공보처의 한 기구로 흡수시켰다. 이것이 오늘날의 KBS(Korean Broadcasting System)의 출발점이다. KBS는 1973년 공영방송체제로 전환하면서 한글명칭을 한국방송공사로 바꾸었다.

 라디오방송의 또 다른 진가가 발휘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었다. 전쟁 중 11개 방송국 가운데 8개가 파괴됐고 부산·대구·대전 등 3개 방송만 무사했지만 서울중앙방송은 대구와 부산으로 옮겨가며 방송을 지속함으로써 대국민 선무활동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 중 방송의 중요성은 1950년 10월 개국한 주한미군방송(AFKN)의 창설목적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미국대사관에서 560㎑로 첫 전파를 발사한 AFKN

의 목적은 첫째 적의 공격 또는 천재지변 등 비상사태 때 유엔군에 경고해 주는 것, 둘째 사령부와 전선 병사간 정보전달, 셋째 유엔군에 군사소식 및 원격교육, 넷째 주한미군에 방송오락 제공 등이었다.

 피폐된 방송시설의 복구는 1953년을 전후로 해서 모두 끝났다. 1956년에는 연희송신소에 이어 수원에 두번째로 대전력송신소가 완공됐다. 수원송신소는 중파 200㎾, 단파 100㎾ 송신장비를 도입하여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을 중앙방송의 가청권에 들게 했다.

 이에 앞서 1954년 12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개국했다. CBS는 원래 1950년 선교방송 개국을 목표로 미국선교본부에 송신기와 부속기자재들을 발주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발발 직전 인천에 도착했던 방송장비들은 임시로 일본에 대피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CBS창설을 주도한 이는 1948년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기독교방송 개국의 사명을 띠고 한국에 온 오토 디캠프(Otto E Decamp 한국명 甘義道) 목사였다. 그는 환도(還都)와 휴전성립 후 설립추진 작업을 재개하여 1954년 4월 체신부로부터 호출부호 HLKY, 주파수 700㎑, 출력 5㎾의 기독교방송 설립허가를 이끌어냈다. 기독교방송이 의외로 빠른 개국을 본 것은 CBS개국 후원회의 역할이 컸는데 여기에는 회장인 김활란(金活蘭)을 필두로 함태영(咸台永)·백낙준(白樂濬)·이기붕(李起鵬)·한경직(韓景職)·김용우(金用雨) 등 쟁쟁한 명망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한편 1950년대 방송과 전자산업의 연계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끝난 또 다른 사건 하나가 1956년의 KORCAD TV방송의 개국이다. 한국 최초의 TV방송국으로 기록되고 있는 KORCAD는 세계 최대 전자기기 메이커였던 RCA사의 한국대리점(KORCAD) 사장 황태영(黃泰永)과 미국 본사와의 합작으로 설립됐다. KORCAD는 1956년 5월 12일 서울 관철동 296번지 동일빌딩에서 호출부호 HLKZ, 영상출력 100W, 채널9로 첫 전파를 발사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홍콩·인도에 이어 네번째, 세계적으로는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에 이어 15번째의 쾌거였다.

 그러나 KORCAD의 개국은 엄밀히 말하면 방송 그 자체보다는 RCA사 TV제품의 한국내 판매 확대가 더 큰 목적이었다. 하루 2∼5시간씩 편성되던 프로그램은 뉴스를 중심으로 교양강좌·음악·퀴즈·스포츠·만담·어린이와 주부프로그램 등 대체적으로 라디오방송의 턴을 벗어나지 못했다. 준비과정도 졸속으로 진행된 면이 없지 않아 개국에 앞선 시험방송기간이 20여일이 채 안됐고 방송국 직원도 20명 남짓한 소규모였다.

 KORCAD의 개국이 매우 성급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정황들이 기록돼 있는데 예컨대 1956년 말 한국의 TV보급대수가 250여대에 불과했고 TV수상기 1대 값이 37만5000환(17인치)이나 되는 고가였다는 사실 그리고 경제개발계획 이전이라서 상업광고방송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상황이었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참고로 1956년도 우리나라 1인당 GNP는 7만환(66달러)에도 못 미쳤다.

 방송국장 황태영과 미국인 사장 조셉 밀러는 결국 경영난으로 1년 이상을 못 버티고 1957년 5월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張基榮)에게 KORCAD를 넘기고 말았다. 장기영은 NTV를 성공적으로 개국시킨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을 모델 삼아 KORCAD를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단장하여 재개국하는 등의 열의를 보였으나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DBC는 국영 KBS TV의 개국시점이 1961년으로 앞당겨지면서 채널9 자체가 국영방송의 몫으로 회수되고 방송요원 다수가 KBS에 흡수되면서 자진 폐국의 길을 걸었다.

 비록 단명에 그치긴 했지만 KORCAD나 DBC의 존재는 한국의 전자산업 발전사에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TV수상기를 저가로 보급할 수 있는 정책이나 관련산업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TV방송의 개국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방송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TV방송시대를 열었고 나아가 KBS TV의 개국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정받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