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9);제 1부 혁명전야 (8)

전기통신의 정착

 해방에서 195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 전기통신사 발전과정은 관련기술의 진보나 시장 확대와 같은 내적 요소보다는 한국전쟁 등 외적 요소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해방과 함께 일제의 철수, 한국전쟁의 발발, 전후(戰後) 재건 등의 격변기에서 전기통신 분야에 관한 접수·환수·파괴·복구 등 일련의 움직임은 언제나 최우선 순위가 됐다. 전기통신이 일반 대중의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차원을 넘어 정치 또는 통치의 수단으로 급부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통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가장 먼저 전기통신시설이나 방송국 등을 접수하여 관리에 만전을 기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실제 해방 후 정부수립까지 좌우(左右)대립과 무정부 상태에서 일반 행정기관의 업무는 더러 마비되기도 했지만 전기통신 업무는 한시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청이 들어서면서 미군 당국이 가장 신경을 썼던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총독부 산하 체신국(遞信局)의 접수였다. 당시 체신국의 최고위직 한국인으로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 소장 길원봉(吉元奉)이었다. 군정청 초대 체신국장 윌리엄 헐리히(W J Herlihy) 중령은 그를 체신확보위원회(遞信確保委員會)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정부수립까지 체신기관의 실무관리를 맡겼다.

 길원봉은 위원장으로서 군정청의 특명을 받아 무정부 상태의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본인 관리로부터 각종 체신사업경영권과 재산의 회수, 일본인의 부정행위 방지 등에 힘을 썼다. 군정청은 해방 후 한동안 체신국내 일본인 관리와 기술자들을 잔류시켜 현업을 유지토록 했다. 군정청이 이들을 잔류시켰던 것은 전기통신의 기술관리와 운영 부문이 처음부터 일본인 수중에 있었기 때문으로, 체신확보위원회는 이들 일본인에 대한 일종의 견제기구 역할을 수행했던 셈이었다.

 길원봉은 이어 군정청 체신국이 체신부로 승격된 1946년 4월부터는 한국인 체신부장이 돼 군정청측 체신부장인 파슨즈 대령과 함께 정부수립 후 출범하게 될 체신부의 직제 마련에 나섰다. 이때 마련된 체신부 직제는 총무국·전무국(電務局)·우무국(郵務局)·저축보험국(貯蓄保險局)·재정국(財政局)·자재국(資材局)·체신학교(遞信學校) 등 7개국 단위가 주요 골격이었다. 이 직제의 가장 큰 특징은 체신업무가 전기통신업무(전무국)와 우편업무(우무국)로 분리돼 전기통신의 비약적 발전을 예고했다는 점이었다.

 전기통신과 우편은 1880년대 중반 이 땅에 근대식 체신업무가 첫선을 보일 당시만 해도 두 업무가 우정총국과 한성전보총국으로 분리돼 있었으나 일제에 들어서면서 총독부 체신국 통신과로 통합됐었다. 두 업무의 특성을 무시한 이같은 통합은 일반 대중의 이용편리보다는 통신에 대한 통제나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발상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출범한 체신부 조직은 약간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 골격은 군정 때의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해방 직후 체신확보위원회가 총독부로부터 접수한 전신회선은 38선 이남의 368회선과 이북의 463회선 등 모두 831회선이었다. 전화교환시설로는 서울과 부산에 최첨단 자동교환기가 설치된 자동식국 3개소를 비롯, 공전식(共電式) 교환기가 설치된 2개소가 있었고 이밖에 자석식 단·복식교환기가 설치된 교환국이 20여 지방도시에 분포돼 있었다.

 교환시설 가운데 가장 낡은 방식의 자석식 교환기는 표시기·전건(電鍵)·잭·플러그 등 간단한 기계시설을 갖춘 수동식 교환대를 말한다. 이때 가입자의 집에는 통화용 축전지나 신호용 발전기 등을 겸비한 핸들식 전화기가 설치된다. 핸들은 신호용 발전기를 작동하기 위한 도구로서 「전화를 건다」라는 말도 원래는 이 자석식 전화기의 「핸들을 돌려 건다」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돼 사용된 자석식은 대부분 1석(席)당 100회선용으로서 스웨덴의 에릭슨사 제품이거나 미국의 웨스턴일렉트릭사 제품을 개량한 일본제가 주류를 이루었다.

 자석식 교환기는 전화 연결대수에 따라 중계접속수가 누증(累增)함으로써 회선 증설에 한계가 있었다. 복식교환기는 이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복식 잭을 교환대 정면에 부착하여 전가입자선을 2∼3대의 교환석에 수용함으로써 중계접속 없이 연결할 수 있게 한 일종의 개량형이었다. 이같은 방식에 의해 복식교환기는 최고 800회선까지 증설할 수 있어 단식교환기의 단점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해방 당시 자석식 단식교환기가 설치돼 있던 곳은 수원·천안·강경·공주·조치원·충주·남원·이리·강릉·철원·진해·진주·울산·안동·포항·통영·경주·상주·김천·제주·순천·여수 등 22개 중소 도시의 전화국이었다. 이들 전화국에는 시내·시외용을 합쳐 6∼10석 규모의 교환기들이 설치돼 있었다. 복식교환기가 설치된 곳은 서울 영등포 분국(分局, 11석)을 비롯, 군산국(19석)·목포국(18석)·대구국(36석)·광주국(18석)·인천국(16석) 등 6곳이었다.

 자석식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했던 전원장치의 전압변동 및 관리상의 문제를 해결한 교환기가 공전식이다. 공전식 교환기는 가정에 개별적으로 설비했던 통화용 축전지를 없애고 대신 이를 교환국에 집중시켜 가입자가 필요로 하는 전원을 교환국이 직접 공급하는 방식이다. 해방 당시 공전식 교환기 설치돼 있던 2곳은 서울 광화문 분국(54석)과 용산 분국(24석)이었다.

 자동교환기는 다시 기계식·반(半)전자식·전(全)전자식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1960년대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것은 모두 기계식이다. 자석식이나 공전식 전화기는 급증하는 가입자를 수용하기에는 회선용량에 한계가 있었고 대규모 전화교환원이 필요한 데다 통화품질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계식 자동교환기는 가입자가 다이얼링을 통해 교환기를 조작하여 착신가입자를 직접 호출해냄으로써 기존 방식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에 보급돼 있던 기계식 자동교환기는 미국의 스트로저(Strawger)식과 독일의 지멘스 할스케(Siemens Halske)식 등 두 종류였다.

 해방 당시 스트로저 교환기는 서울 중앙전화국 본국(8900회선)과 서울 중앙우체국 동분국(東分局, 3400회선) 등 2곳에, 지멘스 할스케식 교환기는 부산전화국(4000회선) 1곳에 각각 설치돼 있었다. 서울본국과 부산국의 시외교환대에는 각각 50석과 30석 규모의 공전식 교환기가 별도로 설치돼 있었다.

 교환기의 국내 생산은 자석식 교환기의 경우 1953년부터 부품을 들여와 조립형식으로 이루어졌고 공전식 교환기는 1963년에서야 비로소 국산화 기종이 보급되기 시작됐다. 교환기 총용량은 해방 당시 약 4만9000회선에서 1960년경 11만여회선으로 증가했다.

 전화가입자는 해방 직전 모두 6만9166명이었으나 남북이 사실상 갈라선 1947년 말에는 4만4966명으로 기록돼 있다. 1960년에는 전화가입자수가 9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해방으로부터 14∼15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했음을 감안할 때 이같은 증가세는 교환기 회선용량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더딘 것이었다.

 증가세가 더디었던 가장 그 이유는 한국전쟁 때 대구·부산지역을 제외한 전국의 전기통신시설 가운데 80% 가량이 파괴됐기 때문이었다. 각종 시설의 복구는 1954년부터 외국의 원조로 시작됐는데 1957년 말경에서야 겨우 전쟁전 수준으로 되돌려 놓을 수가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 당시의 가입자가 사용하던 전화기는 보통전화기와 갑호탁상전화기(甲號卓上電話機)·을호탁상전화기 등 세 종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외형이 목제(木製)로 된 보통전화기는 벽이나 기둥에 설치할 수 있게 설계된 것으로서 벽괘형(壁掛型)으로 불리기도 했다. 탁상전화기는 말 그대로 책상 등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고급형에 속했다. 탁상전화기 가운데 갑호는 송수화기를 연결하여 발전기·유도선륜(誘導線輪)·벨 등을 한곳에 모두 수용한 것을, 을호는 송수화기와 벨이 별도 설치된 것을 각각 통칭했다. 하지만 갑호 및 을호전화기의 성능 차이는 없었다.

 1947년도 말 유형별 전화기 보급대수는 보통전화기가 전체의 68%인 3만500여대, 갑호탁상전화기가 20%인 9400여대, 을호탁상전화기가 나머지 15%인 5000여대의 분포를 이루고 있었다. 보통전화기와 갑호·을호 탁상전화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00년을 전후한 전화도입 초창기부터다. 이후 1950년대 초까지 50∼60년 동안 이들 3종류의 전화기에는 기술적 진보나 외형 설계에 큰 변화가 없었다. 이때 국내에 수급된 전화기는 국산이 전무했으므로 주로 일본제나 스웨덴제, 미국제가 주류를 이뤘다.

 한국전쟁 중에는 유엔군에 의해 한층 개량된 전화기들이 선을 보였다. 그 모양새에 따라 「초가집형」이니 「기와집형」이니 하는 별칭이 붙었던 이들 개량 전화기는 외형이 모두 검은색 플라스틱제로 된 것이 공통점이다. 1961년 체신부가 주관해서 개발한 최초의 국산전화기 「체신1호」는 이 개량형 전화기가 모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