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쇄회로기판(PCB)시장 규모는 지난해 총 270억달러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일본이 전체 시장의 26% 정도를 공급해 수위를 기록했으며 미국이 25%로 2위, 대만이 9%, 중국·홍콩이 6%, 독일이 5%에 이른다. 한국은 지난해 세계 PCB시장의 4% 정도인 11억2000만달러 정도를 생산, 세계 6위의 PCB 생산국으로서 위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올들어 PCB 생산 대국으로서 이같은 한국의 위상이 크게 약화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업계에 팽배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제통화기금(IMF)을 지원받는 경제위기로 인해 국내 PCB업계는 설비투자에 나서지 못한 데 비해 세계 PCB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은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어 우리와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세계 PCB시장에서 패권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자국내에서 빌드업기판을 비롯해 BGA·CSP·MCM 등 차세대 반도체 패키지 기판, 우주항공·정밀용 입체기판, 리지드-플렉시블기판, 고다층 초박 임피던스보드, 메탈, 테플론, 세라믹 등 특수 고부가가치 PCB만을 개발해 생산하고 양·단면 및 저다층인쇄회로기판(MLB)은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등지에서 생산한다는 전략 아래 현지 생산 공장을 경쟁적으로 짓고 있다.
또한 그동안 세계시장에서 우리와 맞대결을 펼쳐온 대만·중국 또한 대규모 설비투자를 진행, 우리의 추격권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미국 등 선진국 PCB업체들의 재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PCB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업체간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구조조정을 벌이는 한편 저급품의 경우 동남아 등지에서 아웃소싱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또한 우리와 엇비슷한 위치에 있는 독일이나 영국 등 유럽 선진국들도 PCB 사업에서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세계 PCB 생산축이 미국·유럽·일본에서 일본을 정점으로 한 아시아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가 새로운 세계 PCB 생산기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점에서 국내 PCB 산업계는 위기와 함께 기회를 맞고 있다.
우선 경계해야 할 대목은 자칫 국내 PCB 산업이 일본·미국의 동남아 현지 공장과 대만·중국의 협공으로 고사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수십년간 축적한 노하우와 장비를 바탕으로 동남아 현지 공장에서 페놀·에폭시 양면 기판을 비롯해 4∼6층짜리 일반 MLB를 생산,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다. 컴퓨터용 MLB분야에서 기술을 축적한 대만은 반도체 및 통신기기용 MLB 분야로 사업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우리보다 아직까지 한 수 아래로 평가되고 있는 중국은 양·단면 PCB시장을 급속히 잠식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저급 MLB 분야에서도 가공할 만한 공급 능력을 축적해 놓고 있다.
현재 선진국과 개도국의 협공에 처한 국내 PCB 산업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일본에 뒤지고 가격적인 측면에서 대만 및 중국에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IMF는 부단한 설비 투자가 필요한 국내 PCB 산업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국내업체들이 이를 회복하는 데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그러나 이같은 세계 PCB 생산 구도 변화가 국내 PCB 산업에 불리한 국면만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내 PCB 산업을 한단계 끌어 올릴 수 있는 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국산 PCB 수출 주 대상국인 미국과 유럽이 PCB 생산량을 줄여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수출 여건이 호전될 수 있는 계기로 볼 수 있다. 이미 올들어 국산 PCB의 미국과 유럽 직수출량이 크게 늘고 있는데 이같은 징후는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통상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에 접어들 경우 그 나라의 PCB 산업 및 기술 수준이 절정기에 진입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인 것으로 미뤄보아 이제 국내 PCB 산업은 꽃봉오리를 터뜨릴 시기라는 것이다.
우리의 국민소득은 IMF 이전에 1만달러 시대의 진입을 눈앞에 두었으나 IMF로 6000달러대로 떨어졌다. 이는 국내 PCB 산업 기술이 1만달러에 상응하는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인건비를 비롯한 생산코스트는 6000달러 시대에 해당한다는 결론이다. 한국 PCB 산업계에 있어 오히려 IMF가 국제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따라서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설비 현대화가 추진된다면 국내 PCB 산업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반도체·LCD에 이은 국내 3대 전자부품산업으로 지위가 강화되고 나아가 세계 5대 PCB 생산국으로서 위상을 드높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국내 PCB 산업의 청사진이 저절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과감한 기업 체질 개선 노력과 세계시장에서 선진업체들과 경쟁해 보겠다는 도전의식이 넘쳐나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종래와 같이 내수시장에 안주하는 사업전개방식으로 사업확대는커녕 기업의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렵다』며 『하루빨리 PCB 사업을 수출 주도형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업계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따라서 국내 PCB업체들은 첨단기술의 조기 확보 및 과감한 설비 투자가 선행돼야 하며 지속적인 해외 마케팅 활동과 직수출 시스템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수출 확대보다 기술과 품질로 승부하려는 질적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수출일선 담당자들의 지적이다.
나아가 세계 경제의 블록화·기술패권주의·각종 무역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와 업계의 공동 네트워크 형성이 절실하며 국제 표준화 활동이나 연구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 향후 PCB 기술 발전 정보에 대한 체계적인 습득 시스템의 구축도 필요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이같은 국내 PCB업체 내부적인 경쟁력 강화만으로 국내 PCB 산업이 선진화되는 것은 아니다. 국내 PCB 산업 발전의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소재 및 장비의 국산화와 첨단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현재 국내 PCB 생산장비의 국산화율은 선진국의 70%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수준이며 드릴·프레스·자동검사장비 등 핵심 장비는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 PCB업체들은 새로운 국제 무역질서로 자리잡게 될 환경라운드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태세를 확립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환경오염물질의 배출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기존 PCB 및 원판의 수입을 규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국내 세트업체와 PCB업체의 공동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국내 PCB 산업은 대변혁의 전환기에 서 있으며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오는 21세기 국내 PCB 산업의 모습이 판이하게 그려질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희영기자 h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