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국제표준화의 위력

홍기호 한국산업표준원장

 오늘날 세계 무역질서는 「국제표준 전쟁」으로 또는 「국제표준 장벽」이란 말로 대변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지적재산권을 중요시하는 신자유무역질서가 형성되고 있고 기술개발 속도도 매우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표준을 내세우는 새로운 무역질서 속에서는 국제표준 제정에 참여하여 자국의 기술과 이익을 반영하고 또 국제표준동향을 수용한 산업체제로 신속히 변화하지 못하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국제표준은 이제 산업의 국제 경쟁력과 생존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내 업계는 선진국이 산업혁명 이후 150여년 동안 수많은 자본과 기술투자로 이룩해놓은 산업표준들을 아무런 대가없이 무임승차한 덕분으로 오늘날과 같은 기록적인 고속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이 해놓은 것을 그대로 흉내만 내서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수많은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지만 국제표준으로 채택되지 않으면 사장되기 일쑤고 국제표준으로 채택만 되면 엄청난 로열티와 시장경쟁 우위를 담보해 주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지난 3월 15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국제표준회의는 이같은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번 서울 국제표준회의는 멀티미디어분야로 정지영상·동영상의 압축기술, 그리고 이들의 부호화와 상호호환성 등을 표준화하는 JTC1/SC29 작업회의였다. 이러한 표준들은 미래산업으로 지목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시대를 가능케 하는 핵심기술이고 이에 걸려 있는 잠재시장과 국제표준을 선점함으로써 보장되는 로열티 수입은 가히 천문학적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때문에 서울회의에는 선진 각국과 신흥개발국 등 22개국에서 428명의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미국의 IBM을 포함한 62개의 기업, 유럽의 필립스를 포함한 78개의 기업, 일본의 소니를 포함한 24개의 기업, 우리나라의 삼성을 포함한 24개 기업 및 연구소, 그리고 캐나다·호주·중국·대만·싱가포르 등 전자·정보통신기업의 전문가들이 모두 참가한 것만 보아도 이번 회의에 쏠린 국제적인 관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각국에서 모여든 전문가들은 국제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육박전을 연상케 하는 치열한 전투를 마다하지 않았다.

 서울회의에서는 국내 기업들이 동영상압축 및 부호화 기술 중 MPEG4에서 10% 정도로 평가될 수 있는 30여건, MPEG7에서는 15%인 20여건의 고유기술들을 표준 초안으로 제안하여 각국의 기술들과 표준경쟁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노력들은 국제표준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 멀티미디어산업의 발전과 함께 연간 MPEG4 분야에서만 1000억원 이상의 로열티 수입이 보장될 전망이다.

 그러나 서울 국제표준회의는 전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연간 1000여회의 회의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의 국제표준회의 참여율은 5%도 되지 않아 OECD 가맹국으로서 부끄러운 실적이다. 우리가 참여하든 말든 관계치 않고 열리는 회의에서 국제표준이 결정되고, 이러한 표준들이 우리의 산업경쟁력을 가로막고 있는 표준장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국제표준화 활동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제 우리의 선택은 모든 국제표준회의에 열심히 동참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번 회의처럼 주도하고 신기술 표준정보들을 우리 산업계에 신속히 공개하여 우리 산업이 미래에 대비하게 함으로 써 새로운 국제표준질서에 적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