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 인포웨어 사장
IMF체제 이후 수요 감퇴로 근근이 버텨오던 소프트웨어(SW) 벤처기업들이 최근 소리소문 없이 문을 닫고 있다. 2만개 벤처기업에서 한국의 빌 게이츠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한국 SW시장 규모는 빌 게이츠의 탄생은커녕 고작 100명 규모의 회사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작다. 빌 게이츠가 한국에 태어나도 협소한 시장에서 무명의 벤처사업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진정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면 지금부터라도 벤처기업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위기에 몰린 SW 벤처기업들을 살릴 처방전부터 제대로 내놓아야 한다.
우선 안정적인 내수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불법복제가 난무하고 외산 SW가 시장을 거의 장악한 상황에서 정부 정책이나 언론의 장밋빛 전망만 믿고 우후죽순처럼 벤처기업이 창업한다면 신생 벤처기업은 물론 기존 벤처기업까지 망하게 하는 시나리오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불법복제는 누구나 다 심각하게 여기는 후진국 병이므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으나 외산 SW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분명 국내 SW 벤처기업을 위협하는 주요인임에 틀림없다. 우리 SW가 외산 제품에 비해 기술수준이나 포장능력이 전반적으로 뒤지는 것은 사실이다. 품질 좋은 외산 SW를 사용하겠다는 데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국산 SW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가전제품·자동차 등과 같은 하드웨어(HW)산업과 달리 SW산업은 국내에서 그동안 거의 보호받지 못했다. 아직까지 허약하기만 한 국내 SW벤처산업은 마땅히 보호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 표준을 장악하고 엄청난 자본과 마케팅력을 앞세운 외산 브랜드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버려야 할 것이다.
국내 벤처기업을 죽이는 괴물은 대기업 위주의 시스템통합(SI)시장이다. 신기술에 대한 연구개발 자금도 마련하기 벅찬 벤처기업들은 재원조달을 위해 별도로 SW 수탁 개발을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영세한 기업 규모로 인해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대기업 계열 대형 SI회사에 빼앗기고 있다. 벤처기업은 아무래도 불안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결국 기술력을 갖춘 벤처기업도 어쩔 수 없이 SI회사의 값싼 하도급이나 수행할 수밖에 없다.
반면 대기업들은 독자기술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계열기업이라는 안정적인 시장을 바탕으로 거의 모든 SW개발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공적인 벤처기업이 탄생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울 지경이다. SW 벤처기업을 살리려면 일정 규모 이하의 프로젝트에 대한 대기업 SI회사의 참여를 배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물론 벤처기업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아가 대규모 프로젝트도 절반 정도는 벤처기업의 하도급 형태가 아닌 컨소시엄으로 참여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내 벤처기업의 취약점인 시장 조사와 예측 등을 지원할 컨설팅이 강화돼야 한다. 가트너그룹·IDC·포레스트리서치 등의 정보기술 전문 컨설팅회사가 한국에서 탄생하기에는 시장규모가 너무 작으므로 공공기관에서 이러한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 번득이는 아이디어 또는 기술만으로 성공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기업들이 하나둘 철수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악화된 국내 상황에 따른 것이지만 현지 시장을 모르고 진출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고 본다. 국내 벤처기업들도 급변하는 기술 환경에서 국내외 시장을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앞으로 정부는 실질적인 지원을 통해 SW산업이 무성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기업·일반소비자·언론 등은 우수한 SW 벤처기업을 적극 성원해 우리나라가 21세기 SW강국으로 도약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