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과 전자산업
1950년대 이후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태동을 방해하던 최대의 적은 외제의 범람, 그 가운데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밀수품이었다. 국산 1호인 금성사의 「A501」 진공관 라디오가 전국 전기상점에 출하될 당시 미군 PX를 통해 밀반입되던 외제 라디오는 월평균 1만2000대나 됐다. 「A501」의 첫 생산량이 80대였으니 그 규모의 방대함은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4·19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1961년 4월 국산 가능한 라디오 부품의 수입금지 및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안을 마련하고 어렵게 빛을 본 금성사의 국산 라디오를 보호함으로써 전자산업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정부수립 이후 전자산업과 관련된 최초의 법안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을 공포한 것은 한달 뒤 5·16으로 집권한 군사정부였다. 군사정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는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공포하면서 라디오 외에도 국산품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모든 품목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최고회의는 여기에 덧붙여 범람하는 밀수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나섰다. 원래 국내 산업보호를 골자로 하던 이 법이 밀수품 단속에 적극 활용된 것은 5·16 직후 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금성사 공장방문이 계기가 됐다.
1961년 7월 박정희 의장(당시는 부의장)이 부산을 방문할 당시 금성사는 의욕적으로 투자한 국산 라디오 사업이 기술과 경험부족에 밀수품 범람까지 겹쳐 엄청난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금성사 입장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가 나서주지 않으면 전자사업에서 철수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국산 전자기기 1호이기도 한 「A501」 라디오 생산 이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금성사의 행로를 잠깐 살펴보자.
1959년 11월 「A501」을 출하한 이후 금성사는 2∼4개월의 간격을 두고 진공관식 「A401」 「B401」 「A502」 「A503」 등과 트랜지스터식 「TP601」 「T701」 「T702」 등 7종의 추가 모델을 잇따라 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 모델은 「A503」을 제외하고는 모두 2∼5개월 만에 단종되고 말았다. 제품의 성능이나 사양이 밀수품들에 비해 크게 떨어져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이 수명이 짧았던 가장 큰 이유였다.
트랜지스터식 라디오 1호 기록을 갖고 있는 휴대형 「TP601」의 경우 1960년 3월에 출하돼 5개월도 못돼 생산이 중단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홀로 전자산업에 진출하여 걸음마조차 불안했던 금성사로서는 트랜지스터와 전지기술을 함께 채택한 포터블 라디오를 개발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TP601」에서 실패를 본 금성사는 1960년 10월 다시 진공관식 전기 라디오로 회귀하여 「A501」을 개량한 고급형 「A502」를 개발했다. 그러나 이 모델마저도 인기가 없자 금성사는 「A501」과 「A502」를 절충한 보급형 「A503」을 발표했다. 다행히 이 모델은 외형도 산뜻했고 가격도 저렴해서 소비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A503」은 1963년 초까지 1년여 동안 꾸준히 생산돼 초기제품 가운데서는 가장 장수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60년 말 금성사는 「TP601」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7석 트랜지스터식 「T701」을 새로 개발하게 된다. 이 모델은 당시로서는 고급 사양인 주파수 다이얼을 비롯, 조명기와 동조계기(同調計器) 등이 부착되는 등 고급형을 지향했으나 가격이 비싼데 반해 고장이 잦아 2개월여 만에 생산이 중단되고 말았다. 「T702」는 기존에 실패한 진공관식 보급형 모델 「A401」의 외양에 「T701」의 회로를 보완, 수정하여 만든 저가 보급형이었으나 이 역시 3개월여 만에 단종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고도 증가하여 「A501」은 3000대나 됐고 후속 모델로 250대를 생산한 「A401」은 대부분이 반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적자가 누적되자 모기업 락희화학에서부터 금성사의 존폐 논의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장 구인회(具仁會)의 6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구평회(具平會, 당시 상무, 창업 고문)가 군사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리는 위기가 겹쳤다.
이런 시기에 박정희 의장의 부산 연지동 공장방문은 금성사로서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최고회의는 자유당·민주당 정부가 구상해온 경제개발계획을 보완해서 시행하는 방안을 집중 검토하고 있었는데 박 의장의 예고없는 금성사 방문도 이런 선상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라디오 생산라인의 안내는 「A501」을 설계했던 김해수(金海洙, 당시 업무과장, 현 신기산업 사장)가 맡았다. 안내 도중 그는 박 의장에게 밀수품 때문에 어렵게 국산화한 라디오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는 점, 그래서 군사정부의 강력한 밀수품 단속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건의했다. 5·16전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서 신문을 통해 「A501」의 소식을 접하고 있었던 박 의장은 김해수의 호소에 공감하고 즉석에서 밀수금지 및 강력한 밀수품 단속을 지시했다.
그 결과 1960년 몇천대에 불과하던 라디오 판매대수가 1962년 한해만 13만7000대로 급증했다. 이는 같은 해 국내에서 판매된 총 라디오대수 34만대의 40%가 넘는 숫자였다. 가히 폭발세라 할 수 있었는데 1985년 간행된 「금성사 25년사」에는 당시 이 상황을 「존폐의 기로에서 방황」하다가 「기사회생의 전기」를 맞게 됐다고 기술하고 있을 정도다. 5.16 직전 락희화학과 금성사 내부에서 동요가 일자, 구인회는 『1년 만 더해 보고 안되면 그때 가서 문을 닫기로 하자』며 직원들을 설득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적중한 셈이었다.
밀수품 단속령과 함께 금성사를 기사회생시킨 또 하나의 사건은 박정희 의장의 연지동 공장방문 직후부터 이뤄진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었다. 금성사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운동은 처음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1962년 7월 7일 공보부가 적극 나서면서 전국적인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금성사측이 최고회의를 설득시켜 공보부 장관 이원우(李元雨, 작고)를 전면에 등장시킨 것이었다. 이어 일주일 뒤인 7월 14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이 운동을 직접 후원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각 신문들은 사고(社告)를 통해 농어촌에 보내게 될 라디오 현품과 현금을 수집, 모금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공보부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결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공보부에서는 라디오 없는 농어촌을 일소키 위해 「농어촌에 라디오를 보내자」라는 구호 아래 14일부터 범국민운동을 편다. 그 본부를 공보부에 두고 각 신문사와 방송국에 지부를 두어 국민들이 희사하는 현품과 현금은 지부를 통해 전달키로 하였는데 14일 오전 제일착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부부가 트랜지스터 라디오 3대를 공보부에 기탁하였다….』<동아일보1962년 7월 15일자>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까지 확대된 데에는 하나의 비화가 있다. 군사정부 최고회의는 부정축재자로 옥고(獄苦)를 치른 구평회를 통해 락희화학과 금성사측이 김포가도(金浦街道) 연변의 초가(草家) 개량사업에 나서줄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 이때 금성사측이 역제안한 것이 바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었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돌입한 군사정부는 계획의 성공 여부가 5·16 정권의 정당성과 경제개발의 필요성을 알리는 대국민 홍보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금성사와 최고회의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확산된 이 운동은 1963년까지 계속됐는데 이렇게 해서 전국 농어촌에 보낸 라디오가 무려 20만대가 넘었다.
한편 밀수품 단속과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63년을 전후한 시기, 국내에서 라디오를 생산하던 곳은 금성사 외에도 삼양전기(三洋電機)·태양전기(太陽電機)·아이디알공업 등 3개 기업들이 더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영세기업 수준을 탈피하지 못해 그 생산규모는 금성사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못됐다. 일례로 1962년부터 국산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해외수출이 시작됐는데 1965년도 상공부 전기공업편람에 따르면 이해 4사의 라디오 총수출액은 66만5916달러, 이 가운데 금성사가 기록한 액수는 전체 90%에 가까운 59만5698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국산 전자제품의 해외수출은 상공부가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1962년 홍콩 등지에 동남아통상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시작됐다. 이때 사절단에 소속됐던 금성사 관리부장 구자두(具滋斗, 현 LG유통 상임고문)는 홍콩의 무역회사 바노측과 트랜지스터식 라디오 18대를 견본 수출하기로 합의했고 이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뉴욕의 아이젠버그사에 「T703」 등 62대(594달러)분의 수출계약을 성사시킴으로써 1962년 11월 국산 전자기기의 첫 선적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됐다.
그러나 이때의 국산 라디오 수출은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던 소니·산요·내셔널·RCA 등 일제와 미제에 대항해서 시장을 개척한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주력 수출품이던 「T703」의 경우 내수가격은 3300원이었는데 반해 수출가격은 13달러(당시 환율로 1690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같은 출혈 수출을 강경하게 밀어붙인 것은 군사정부였다. 군사정부는 공산품의 수출을 적극 장려한다는 명목으로 해당 업체들에 출혈 액수만큼 보상해 주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