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은 무한한 상상력을 낳게 한다.」
삼성영상사업단이 「쉬리」 이후 또다른 한국영화의 진기록을 기대하며 15억원의 제작비를 댄(유상욱 감독)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이번 주말 개봉된다.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 시나리오의 쾌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 픽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복잡하고도 밀접한 구성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이상(본명 김해경)이 지난 32년 발표한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시를 모티브로 일제 총독부 치하에서 잠시 건축가로 일했던 이상의 이색적인 경력을 들춰내 일본이 한반도의 기를 차단하기 위해 중앙박물관(구 조선총독부) 지하에 철기둥을 박았다는 소위 「음모론」을 연결시킨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허물 때 지하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철심을 비롯, 박물관 건물이 일본의 일(日)자를, 현 서울시청이 본(本)자의 형태를 따라 지어진 사실 등 한민족의 정기말살이라는 군국주의적 풍수지리사관설을 단초로 한 것이다.
이상의 시로 논문을 준비하던 용민(김태우)과 이상에 관한 기사를 쓰던 태경(신은경), 자신의 계보를 찾고 싶어하는 덕희(이민우), 이상의 그림을 갖고 싶어하는 캔버스(권병준), 핑크 플로이드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이상의 오감도가 필요하다는 카피캣(박정환) 등 5명의 젊은이는 PC통신에 「매드(Mad) 이상 동호회」를 만들어 이상의 시와 관련된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먼저 소설을 올린 카피캣과 캔버스가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살인현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사인과 호랑이 얼굴이 새겨진 목걸이가 발견되면서 덕희·태경·용민은 숨겨진 음모를 뒤쫒게 된다.
박 전대통령이 이미 70년대 말에 이상의 시와 관련된 일제의 비밀 지하 금괴공장의 연관성을 캐기 위해 비밀요원 4명을 파견했음을 확인한 이들은 점점 진실의 실체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일본군 장교 하야시 나츠오의 혼령이 비밀요원의 몸을 빌어 국립중앙박물관 지하에 박힌 거대한 철제 기둥을 보호하는 것으로 설정된 「건축무한…」은 첩보 스릴러와 심령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96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최우수 당선작(작가 장용민)으로 선정된 이후 수없이 많은 보완과정을 거쳐 3년여만에야 빛을 본 것이다.
주요 장면 촬영장소인 박물관 지하의 가상 지하 터널과 수직 갱도의 규모 역시 영화를 실감나게 한다. 광명시에서 영등포까지 높이 4m, 길이 10㎞의 한전 지하 케이블 터널과 직선거리만 3㎞가 넘는 안양토기동굴이 촬영장소로 사용됐다. 또 철제 기둥이 박힌 육면각체의 방을 연출하기 위해 만든 높이 12m에 달하는 원형 돔과 12지신상의 정교함도 눈에 띄며, 자동차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촬영한 자동차 추격전 장면도 박진감을 준다.
그러나 난해한 이상의 시와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줄곧 등장하는 설명조의 대화가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주인공들의 연기도 영화 안에 잘 녹아들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