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책과 법규 정비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세웠던 경제정책의 골간은 기간산업의 건설 확립, 수출무역의 진흥, 국가관리 기업체의 운영합리화 등이었다. 군인들이 집권하면서 자신들의 진로에 대해 한동안 암중모색하던 경제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李秉喆), 삼호그룹의 정재호(鄭載頀), 삼양그룹의 김연수(金秊洙), 대한그룹의 설경동(薛卿東), 화신그룹의 박흥식(朴興植), 락희그룹의 구인회(具仁會), 현대그룹의 정주영(鄭周永), 한국초자그룹의 최태섭(崔泰涉), 극동그룹의 김용산(金用山), 개풍그룹의 이정림(李庭林), 금성그룹의 김성곤(金成坤) 등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재벌급 기업가 20여명이 재빨리 경제재건촉진회(經濟再建促進會)라는 단체를 만든 것은 이때였다.
경제재건촉진회는 한달여 만인 1961년 7월 한국경제인협회(韓國經濟人協會)로 이름을 바꿔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집행방향을 탐색하면서 정부의 요청을 최대한 수용할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다. 1968년 한국경제인협회가 다시 이름을 바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단체가 전국경제인연합회다. (경제기획원의 발족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 등 1960년대 초반 경제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 소개키로 한다.)
1961년 하반기 들어 군사정부는 몇가지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국근대화의 최우선 정책과제로서 추진키로 한 전기 및 전화 확대보급 등 전화(電化)촉진정책이었다. 정부의 정책방향을 예의주시하며 숨가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기업들이 저마다 독자적인 대응 계획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국산 제1호 라디오 생산으로 부상한 구인회의 금성사, 전화기와 교환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박율선(朴律善)의 동양정밀공업(OPC), 전선분야에서 가정용 전기기기분야 진출을 모색하던 설경동의 대한전선 등 전기통신분야 업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업계획을 보면 대개는 신규분야 진출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금성사는 전기·전선·통신기기, 대한전선은 일본 기업들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냉장고·세탁기·TV 등의 신규 진출을 꾀했다. OPC는 지난 호에서 언급했던 통신기기 전문기업을 표방하면서 교환기 국산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 하나가 금성사의 「회사발전 5개년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서독에서 들여오기로 한 차관을 토대로 작성된 이 계획은 한국전력에 공급할 적산전력계(積算電力計)와 체신부에 납품할 전화기 그리고 전력케이블과 통신케이블 등 전선의 양산 방안이 주요 골자였다. 여기에는 물론 세탁기·냉장고·선풍기·엘리베이터 등 전기의 공급확대 이후를 겨냥한 전기용품의 생산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전화촉진정책과 관련해서 전기통신분야 기업들이 「목을 맨」 곳이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전기·통신분야 수요를 사실상 좌지우지하던 상공부 전기국(電氣局)과 체신부의 전무국(電務局)이었다.
상공부 전기국이 초기 전기통신공업을 주도한 것은 여러 가지 관련법규의 제정을 통해서였다. 관련법규의 제정은 전기통신공업 부문의 활성화에 기폭제가 됐다. 기업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고 뒤이어 생산시설의 신설과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상공부가 60년대 중반까지 제정을 주도했던 주요 법규들로는 5·16직후 금성사의 국산 라디오 등의 보호육성을 겨냥해 공포된 「특정외래품 판매금지법」을 비롯, 합법적인 공업표준을 제시한 「공업표준화법」, 전기용품의 품질관리에 역점을 둔 「전기사업법」, 불량 전기용품의 제조를 원천적으로 금지시킨 「전기용품제조면허규정」, 농어민 생산성 증강과 생활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농어촌전화(電化)촉진법」, 각종 전기기기에 대한 사용재료·구조 등 기술적 명세를 규정해 놓은 「전기용품 기술기준령」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1961년 9월 30일 공포된 「공업표준화법」은 광·공업제품의 품질개선을 도모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표준법안으로서 1969년 1월의 전자공업진흥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5년 대통령령으로 제정 공포된 「전기용품제도면허규정」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용품에 대한 제조면허와 형식승인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1962년 주식회사로 출범해서 전기국의 직할대 역할을 했던 한국전력도 나름대로 소임을 담당했다. 일제 때부터 있었던 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전업 등 전기 3사가 강제 합병돼 탄생한 한국전력은 군사정부의 농어촌 전화(電化)촉진정책의 최첨병이었다. 한국전력의 출범은 5·16직후 한달여 만에 발효된 한국전력주식회사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초창기 한국전력은 적산전력계·변압기·계전기·전선·규소강판·애자 등 전기기기 및 소재를 비롯해 철탑제작설비의 수요를 이끌었다. (한국전력은 1980년 12월 한국전력공사법에 의해 공기업으로 변신했다.)
체신부 전무국(電務局) 역시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현 한국통신)로 조직 자체가 독립해서 공사화(公社化)될 때까지 1960년대 우리나라 전기통신산업 수요 창출의 중심지가 됐다. 전화기·교환기·케이블 등의 수요가 모두 전무국을 통해 창출됐다. 1961년 10월 현재 체신부 전무국 조직은 전무기획과·전신전화과·국제통신과·기계과·선로과·전송과 등 6과로 돼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정부의 전화촉진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업무가 폭주해 1963년 12월 기계과·선로과·전송과는 공무국(工務局)이 신설되면서 분리되었다.
이때 정부의 뜻에 따라 체신부가 발표한 전화촉진정책의 하나가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이었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 5년씩 4차에 걸쳐 20년 동안 계속된 이 사업은 처음부터 군사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업고 시작됐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5년 동안 추진된 제1차 계획의 목표는 지방통신시설의 보급, 전신전화시설의 확장, 전신요금의 현실화, 관련산업(통신기재분야)의 육성 등 크게 네가지였다.
정부예산과 국제개발처(AID)·정부보유외환자금(KFX)·서독정부차관 등 외자를 합쳐 모두 157억원의 사업비가 소요된 제1차 계획은 구체적으로 가입자전화 및 장거리전화시설의 확충, 900여 우체국의 신설, 전기통신시험 및 관리품목의 확대, 통신기술훈련소의 신설 등에 중점을 두었다. 제1차 계획 결과 12만3000여회선이던 가입자전화시설이 31만5000여회선으로 증가했고 인구 100명당 전화보급률도 0.48대에서 0.94대로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기계식 자동교환기·케이블·전화기 등의 관급형(官給型) 수요가 폭발했고 기업들의 신규사업 진출과 기존사업의 확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1961년 12월 공포된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은 기업활성화에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해줬다. 기업의 경제적 기회균등과 자주적 경제활동을 보호 유도한다는 방침 아래 제정된 이 법은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기술과 재원이 취약했던 당시 전기통신업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전기통신업계를 3분하고 있던 전기공업계·통신공업계·전선공업계가 모두 중소기업협동조합법에 의거해서 각각의 이익을 대변할 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협동조합의 출범은 기업들이 정부기관이나 한국전력 등 대규모 수요처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개별 기업들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됐다.
이들 조합 가운데 1962년 4월 가장 먼저 출범한 곳은 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이었다. 전기통신분야 단체로서는 거의 유일했던 사단법인 대한전기공업협회는 같은해 2월에 있었던 제7차 정기총회에서 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의 출범을 전격 의결했다. 한국전력 등의 수요에 효율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단법인과 같은 친목단체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 창립 발기인으로는 장병찬(張炳贊 이천전기 사장)·김광준(金光俊 국제전기기업 사장)·김지욱(金址郁 대한전선 사장)·박승찬(朴勝璨 금성사 사장)·최준규(崔俊圭 삼양전기공업 사장)·성두현(成斗鉉 신광기업 사장) 등 14개 기업의 대표가 참여했다. 정식 출범 때는 발기인을 낸 14개사 외에 진해축전지(鎭海蓄電池)·광화전업사(光和電業社) 등 30개 기업이 가세했다. 조합의 초대 이사장은 이천전기의 장병찬 사장이 맡았다.
한국통신공업협동조합은 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보다 한달 늦은 1962년 5월에 창립식을 가졌다. 박율선·박승찬·김지욱·이동문(李東文 한국통신기공업 사장) 등 8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출범 때는 통신기기·전선 등 분야에서 17개사가 추가로 참여했다. 이 조합의 정관을 보면 우선 통신기기의 생산·가공·수주판매·구매·보관·운송·서비스 등 모든 기업활동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을 주요 사업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는 다른 협동조합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선공업협동조합은 1963년 12월 모법(母法)인 중소기업협동조합법 시행령이 개정됨에 따라 출범 근거를 확보하게 됐다. 시행령 개정에서 전기공업 및 통신공업에 각각 포함돼 있던 전선공업분야가 중분류(中分類)의 독립업종으로 분리된 것이었다. 시행령 개정과 함께 출범한 한국전선공업협동조합의 발기인으로는 김지욱·김정도(金正道 중앙전선 사장) 등이 참여했다. 출범 때 회원사로는 대한전선·광화전업·조선기업·시온전기 등 한국통신공업협동조합 회원사 가운데 전선업종 기업들이 주축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