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15);제 2부 산업의 태동 (6)

가전산업과 TV국산화

 국산 TV 제1호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66년 8월 1일이었다. 이날 오후 금성사 부산 온천동(溫泉洞) 공장에서는 진공관 12개와 다이오드 5개를 채택한 19인치 흑백TV 「VD­191」 100대가 첫 출하됐다. 국산 진공관 라디오 제1호가 생산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금성사는 일본 히타치제작소(日立製作所)와 기술제휴로 1966년 말까지 1만대의 「VD­191」을 생산하여 보급했다. 1966년도 우리나라 TV보급대수가 10만대였으니 「VD­191」은 생산 5개월 만에 전체 보급량의 10% 가량을 담당한 셈이다. 당시 흑백TV의 가격(소매)은 일제 17인치가 7만8000원, 19인치가 10만원선이었다. 미제는 19인치가 13만원, 23인치가 15만원 선이었다. 이 가격의 틈바구니를 뚫고 금성사는 「VD­191」의 소비자가격을 일제보다 훨씬 싼 6만3510원으로 정했다. 수입대체 국산품에 대한 정부의 배려에 의한 결과였다.

 그런데 금성사가 당시 법규와 세제(稅制)대로 산출했다면 「VD­191」의 소비자가격은 8만7683원으로 높아져 외제와의 가격경쟁력에서 크게 손해 볼 뻔했다. 이런 가격이 산출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① 대당원료비 47.90달러(생산과정의 로스율, 예비율 각각 5% 포함, 환율 272.50원)

 ② 수입관세 평균 30%

 ③ 재무부고시 특관세(特關稅) 30%

 ④ 완제품에 대한 물품세 30%

 이런 가격구조에서라면 각종 공과금은 전체 소비자가의 50%에 가까운 4만2000원이나 됐다. 비정상적인 수입품에 대한 특관세, 국산화 이전 외국 완제품에 대한 물품세가 주원인이었다. 「VD­191」의 부품 대다수가 일본 등에서 수입된 것이었는데 여기에 특관세와 물품세가 부과된 것이었다. 정부의 의지와 권고에 따라 TV의 국산화에 나선 금성사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VD­191」의 출하에 앞서 금성사는 정부에 「TV수상기 국산화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건의서에서 금성사는 「전자기기의 수출 극대화」 「기계공업의 육성유도」 「TV수상기 보급의 대중화」 「공보정책상 TV중계망의 전국화에 따른 수상기의 확보」 등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TV부품 수입관세 등의 조정을 주장했다. 이 건의서에 따라 상공부는 1966년 하반기 무역계획을 일부 변경하면서까지 TV용 부품도입 기준을 완화해 줬다. 6만3510원의 소비자가격이 이렇게 해서 정해진 것이었다.

 금성사가 여러 난관을 뚫고 「VD­191」을 생산하기까지는 1959년 국산1호 라디오 「A­501」 이후 계속된 선풍기(1960년), 트랜지스터시계·자동전화기(이상 1962년), 적산전력계·전기모터·전축(이상 1963년), EMD식 자동교환기(1964년), 냉장고(1965년) 등의 개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대부분이 국산1호라는 별칭이 붙은 이들 전자기기의 개발 과정에서 금성사는 대정부 로비, 외국자본 및 기술 유입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쌓을 수가 있었다. 물론 KBS를 필두로 MBC·TBC 등 TV방송의 잇따른 개국 등 수요 기반의 안정적 확보와 관련된 사회적 여건 조성도 큰 몫을 했다.

 선풍기의 경우, 금성사는 1960년 초 쇠파이프를 휘어 몸통을 만든 국산1호 「D­301」을 개발했으나 이듬해 단종시키고 각도조절과 상하작동이 가능한 선풍기 머리, 키보드식 버튼, 로터리식 타이머 등이 부착된 제품을 1963년부터 선을 보였다. 적산전력계는 서독 후어마이스터사의 시설 차관과 히타치제작소의 기술제휴로 선을 보여 1964년 한해에만 18만개를 생산했다.

 1965년에 개발된 냉장고는 금성사로서는 TV 다음으로 중요시했던 품목이었다. 모기업 락희화학(樂喜化學)에서 사용되는 치약원료용 냉동실의 제작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냉장고의 구조와 전기회로는 미군 PX에서 불법 유출된 빙과점용 냉동기를 역분석(Reverse Engineering)해서 알아낸 것이었다. 금성사 구정회(具貞會) 사장 집의 미제 RCA 냉장고를 완전 분해해서 연구자료로 활용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이렇게 해서 1965년 4월 국산1호 냉장고 「GR­120」이 탄생할 수 있었다. 120리터짜리 이 모델은 RCA·웨스팅하우스 등 미제가 판을 치던 국내에서 8만6000원에 시판돼 6000대가 팔리는 큰 성공을 거뒀다.

 금성사가 이들 기기의 개발과 함께 곧바로 대량생산에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 온천동 707번지 일대 2만7000평에 대단위 종합 전자생산공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온천동 대단위공장은 적산전력계만을 생산하려던 것을 TV·라디오·냉장고·전화기 등 종합 전자기기 생산시설용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종합 전자기기의 생산계획에 대한 골자가 5·16 직후 만든 「회사발전 5개년계획」이었다. 외국 차관에 의존한 이 계획은 1962년 2월 국무회의에서 통과됨으로써 같은 해 9월 공장 신축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시설자금은 서독 후어마이스터사가 제공한 차관 500만마르크(125만달러 상당)였는데 이는 지난 호에서 설명한 대로 외자도입 운용방침이 적용된 민간차관 1호였다.

 1964년 3월 1차 완공된 온천동 대단위공장의 월간 생산량은 적산전력계 4만6000개, 라디오 3만대, 전화기 1만8000대, 선풍기 5000대 등으로 당시 국내에는 이에 견줄만한 시설이 없었을 정도였다. 금성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69년까지 온천동 대단위공장을 11개동에서 19개동으로 증축해서 EMD식 교환기와 냉장고 생산에 할당했다.

 한편, 금성사가 흑백TV 생산계획을 구체화한 것은 온천동 대단위공장 착공 직후인 1963년 1월이었다. 이때 금성사는 진공관라디오 설계자였던 김해수(金海洙)·곽병주(郭炳周)·김균(金均)·안상진(安祥鎭) 등 7명의 엔지니어들을 기술제휴선인 히타치제작소에 파견, TV생산을 위한 기술확보에 나섰다. 또 온천동 공장에 15만달러 규모의 TV생산설비를 갖추었다. 이에 앞서 정부는 1961년 12월 31일 국영 KBS­TV가 개국하면서 5·16에 대한 당위성과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국민 교육과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TV수상기의 보급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1962년 초 공보부는 2만대의 TV를 수입하여 보급에 나서는 한편,때마침 「회사발전 5개년계획」을 발표한 금성사에 TV 국내 생산을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3년에 들어서면서 TV 생산에 대한 국내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외국인 투자가 아닌 차관 중심의 외화가 마구 유입됨으로써 외환 위기를 불러왔고 전력(電力)사정도 좋지 못했다. 외화를 들여와 TV를 생산하는 일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 「차관망국론(借款亡國論)」이 대두된 것도 이때였다. 당연히 국내 생산에 필요한 부품의 수입허가도 나지 않아 금성사는 TV 생산계획을 재고해야만 했다.

 금성사가 이를 돌파하고 TV의 안정적인 판로 확대를 위해 생각해낸 것이 언론사를 직접 경영하는 방안이었다. 그 첫 시도로 구인회(具仁會) 회장이 1964년 부산지역 유력지인 국제신보(國際新報)를 인수하고 대표이사 발행인에 취임했다. 구인회는 이어 같은 해 삼성그룹 이병철(李秉喆) 회장과 50 대 50 지분으로 라디오서울주식회사와 동양텔레비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공동 운영키로 했다. 그러다가 경영방식을 놓고 둘 사이의 의견 차가 커지자 1964년 5월 9일 개국한 라디오서울은 삼성측이, 같은 해 12월 7일 개국한 동양텔레비전은 락희측이 각각 인수키로 합의했다. 하지만 1965년 삼성측이 동양텔레비전마저 인수함으로써 락희의 방송진출은 결국 무산됐다. 삼성측은 이때 인수한 동양텔레비전과 라디오서울을 합쳐 중앙방송으로 부르다가 1966년 사명을 동양방송, 약칭을 TBC로 바꿨다. 동양방송은 1974년 다시 중앙일보와 합병하여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으로 또 한번 개명을 했다.

 방송진출을 포기한 금성사는 때마침 외환위기가 가라앉고 TV 국내 생산에 대한 반대 여론이 수그러지자 1965년 초 정부에 「TV수상기 국산화 계획 및 전기제품 수출대책에 관련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 건의서에서 금성사는 「TV수상기만 (전기공업분야에서) 미개척분야로 남아 있다」고 전제하고 「북괴의 대남 방송준비 및 남해안 일대의 일본방송 배제를 위한 국내 보도활동의 확장 강화」 「TV특별회계로 유지되는 국영 KBS­TV의 합리화」 「고용증대와 관련산업 조성 등 국민경제 발전과…수출대상 제품산업으로서 외화 획득」 등의 이유를 들어 TV의 국내 생산 필요성과 함께 생산 가능성을 역설했다.

 이 건의에 대해 정부는 1965년 12월 외환사정이 호전되고 동시에 국민의 소득 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 금성사의 TV생산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제한된 범위란 국산화율 50% 이상일 것과 함께 TV용 부품 수입은 라디오 등 다른 전자전기제품을 수출해서 벌어들이는 외화만큼만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외화사정을 감안해서 수출외화­수입외화 링크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정부는 금성사에 이어 동남전기(東南電機)와 일본의 샤프간, 한국마벨과 미국 RCA간 기술제휴 및 흑백TV생산을 승인했다. 이는 삼양전기(三洋電機)·천우사(天友社)·동신화학(東信化學)·대한전선(大韓電線)·삼성산요(三星三洋) 등이 잇따라 TV 생산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1960년대 흑백TV의 생산은 콘덴서·저항기·브라운관 등 300여종이 넘는 전자부품 수요를 유발하는 전자산업의 총아였다. 그런 점에서 TV의 국내 생산은 영상매체시대의 개막과 함께 전자부품산업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