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기업 부설硏 "속빈 강정"

 IMF 이후 기업들의 부설연구소 설립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 97년 말 이후 올 3월 말까지 설립된 부설연구소는 무려 1000여개가 넘는다. 이에 따라 국내 전체 연구소가 4000개를 돌파했고 연구개발(R&D) 인력도 총 8만7388명에 이른다. 특히 중소기업의 R&D인력은 4월 말 현재 지난 97년 말보다 7% 늘어난 2만8893명에 달한다.

 수적으로만 보면 IMF로 「먹고 살기 어려웠던」 지난 한 해에 대기업조차도 인력을 감축하고 연구소를 축소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른바 종업원 10여명 미만의 소기업들이 3∼4년을 내다보고 부설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대대적인 R&D 투자를 늘려 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기업들이 각종 제도상 허점을 이용, 정부의 연구개발정책자금을 타내기 위한 수단 또는 벤처기업으로 지정받아 벤처창업자금을 타내기 위해 변칙적으로 설립된 부설연구소가 많다. 특히 연구소 설립 법정 기준인 연구전담인력 5명을 채우기 급급한 초미니 연구소 설립이 많아 중소기업들이 벤처기업으로 지정받기 위해 부설연구소를 설립하고 있다는 지적이 팽배하다.

 기업부설연구소의 설립 신고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설립된 기업부설연구소는 700개. 올들어 새로 설립된 것만 해도 5월 현재 357개에 이르고 있다. 올해 설립된 연구소 중 10명 이상 전담 연구인력을 확보하고 있는 연구소는 전체의 16.0%인 57개에 불과하고 나머지 84.0%는 연구인력이 10명도 못되는 곳이다. 특히 연구인력이 5명 미만으로 사실상 R&D 기능을 할 수 없는 초미니형 연구소도 전체의 27.8%인 97개다.

 현재 정부의 벤처기업 육성정책에 따라 과기부·정통부·산자부·중기청 등 중앙부처와 각 지방자치단체 등은 벤처기업에 대해 각종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현행법상 벤처기업으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창투사나 창투조합의 투자총액 및 주식인수총액이 각각 자본금의 20% 이상, 10% 이상인 경우 △특허기술 생산제품이 매출액의 50% 이상 △신기술 제품의 매출액이 전체의 50% 이상 △R&D 비용이 전년도 매출액의 5% 이상일 경우다.

 소규모 기업 입장에서 보면 이 중 벤처기업으로 지정받기 가장 쉬운 항목이 R&D 투자부문이다. 인건비까지 R&D 투자비로 인정해주고 있는 현 제도상 굳이 R&D 비용을 투입하지 않더라도 기존에 채용해 인건비를 지급하고 있는 인력만으로 연구소를 설립할 경우 손쉽게 벤처기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정보통신업체인 A사 부설연구소. 사장을 포함해 석사 3명, 학사 2명의 기존 인력으로 부설연구소를 설립한 후 회사 간판 옆에 연구소 간판을 하나 추가해 달고는 벤처기업으로 지정받아 무려 4군데에서 벤처자금을 타냈다. 또 다른 정보통신업체인 B사는 올초 기존 직원들을 중심으로 부설연구소를 설립하고는 산자부와 정통부로부터 정책자금을 타낸 후 연구소는 책상 하나만 있는 텅빈 공간이 됐다.

 최근 기업부설연구소 실태를 조사한 관계자들은 『신설되는 초미니 기업부설연구소의 90% 이상을 벤처기업 지정을 받기 위한 변칙적인 연구소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과기계 관계자들은 서울 서초·강남구 일대를 비롯, 벤처기업이 몰려 있는 곳에는 이른바 「유령 기업부설연구소」도 등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한 관계자는 최근 대통령에게 보고한 「선진국 진입을 위한 기업의 경쟁력 제고방안」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기업부설연구소를 대상으로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12개 업체의 부설연구소가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현행 과기부의 기술개발촉진법상 기업부설연구소 설립 기준에 따르면 연구전담인력을 5인 이상 확보해 산업기술진흥협회에 신고하기만 하면 기업부설연구소로 인정받아 R&D 투자에 따른 세액공제와 연구인력 및 연구기기 등의 조세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산기협 김승재 상무는 『인력부족으로 모든 신규 기업부설연구소를 대상으로 실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며 『벤처기업 특성상 임직원의 대부분이 모두 연구개발인력이어서 회사가 곧 기업부설연구소가 될 수밖에 없고 이 경우 기업부설연구소 설립이 꼭 벤처기업 지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반문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김훈철 위원은 『지난 한해에만 무려 7100여명의 연구인력이 퇴출당하는가 하면 기업들의 기술개발자금 삭감으로 산·학·연 협동연구과제 450개 중 35개 과제가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고 올들어 대기업의 자금지원 중단 등으로 중소 협력업체의 기술개발이 극히 저조한데도 기업부설연구소 설립이 늘고 있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 권기정 실장은 『단지 제도상의 허점을 이용해 벤처기업 지정을 위한 기업부설연구소 설립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는 무분별한 벤처기업의 설립을 막기 위해서라도 기업부설연구소의 설립 요건을 강화해 아무나 벤처기업 지정을 받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기술계는 벤처기업의 지정요건 중 연구개발투자 5% 이상 요건을 없애거나 기준을 대폭 상향 조정해 기업부설연구소를 내실있게 운영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창훈기자 ch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