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철
◇75년 서울대 응용물리학 졸업
◇77년 한국과학기술원 고체물리학 석사
◇84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재료물리학 박사
◇84~89년 미국 이스트만코닥연구소 책임연구원
◇86~94년 SKC.삼성.LG.태일정밀 기술자문
◇94년 KBS 과학프로그램 진행자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 교수. 스핀정보물질연구단장
4000여년 전 자철광이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자성체는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문명 이기의 중요한 물질로 인류문명 발전에 기여를 해오고 있다. 고대시대부터 항해의 필수품인 나침반으로 사용됐고 19세기 산업혁명시대에는 모터 및 발전기의 핵심 물질로 이용되어 산업혁명의 근간이 됐다.
오늘날 자성체의 활용은 실로 광범위하다. 현대인에게 필수품인 각종 크레디트 카드, 전화카드 등에는 감마페라이트라는 산화철 자석물질이 코팅되어 여기에 자기정보가 기록된다. 전화기 및 핸드폰의 송수화기 등에는 자석이 있어 코일에 흐르는 전류의 변화에 따라 진동판에 힘을 다르게 작용함으로써 소리를 내거나 감지하고 있다. 자동차에도 스타트모터를 비롯한 각종 모터, 속도계, 연료계, 에어백센서 등에 네오디뮴철보론(NeFeB)계의 강력한 자석이 사용되고 있다. 벤츠같은 고급차에는 100여개의 자석이 각종 모터 및 센서에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석은 MRI 등 첨단 의료기기 물질로, 컴퓨터 하드디스크나 플로피디스크의 정보저장 물질로, 생산공정 분야의 감지센서 물질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인간을 비롯한 포유동물의 신진대사에 없어서는 안될 페리틴(Ferritin)과 같은 생체 단백질물질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성체는 실로 광범위한 분야에서 현대문명 이기의 핵심물질로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물체가 왜 자기적 현상을 띤 자성체가 되는가에 대한 의문은 20세기 초 양자역학과 상대론이 나오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는 질량 및 전하 외에 스핀(Spin)이라는 새로운 물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스핀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양자역학과 상대론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고전역학적인 모델로 쉽게 설명하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며 동시에 지구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듯 원자세계에서도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도는 공전운동과 동시에 전자축을 중심으로 자전운동을 하고 있다. 바로 전자의 자전운동이 스핀이라는 물리적 특성을 준다.
전자의 공전운동과 자전운동 모두가 자기적 특성을 야기하지만 공전운동에 의한 기여도는 자전운동에 의한 기여도에 비해 미미하여 전자의 스핀이 원자의 자기적 특성을 좌우하게 된다. 이때 이웃 원자간에는 원자 스핀에 의한 소위 교환상호작용(Exchange Interaction)이 존재한다. 이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되는 에너지가 주변 온도로 발생되는 열에너지보다 작으면 이웃 원자간의 스핀 방향은 서로 무관하게 된다. 대부분의 금속이나 반도체 물질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이 교환상호작용 에너지가 열에너지보다 큰 물질의 경우는 이웃 원자들간에 스핀 방향이 서로 질서있게 정렬되는 협동현상을 보이는데 바로 이런 물질이 자석의 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웃 스핀간의 정렬되는 양상은 서로 같은 방향으로 정렬되는 강자성체(Ferromagnetism), 반대 방향으로 정렬되는 반강자성체(AntiFerromagnetism), 스핀이 큰 분자와 작은 분자가 교대로 정렬되는 준강자성체(Ferrimagnetism) 등으로 다양하다. 철·코발트·니켈 등은 단원자 물질로 상온에서 강자성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자연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자성체 물질이다.
정보시대인 오늘날 자성체의 최대 응용분야는 컴퓨터 고밀도 디지털 정보저장을 위한 자기기록 및 광자기기록기술 분야이다. 자기기록기술은 기록헤드의 유도코일에 흐르는 전류의 방향에 따라 자성매체의 스핀 방향을 좌우로 조절하여 이진법의 정보비트를 기록한다. 기록된 정보의 재생은 기록된 비트의 스핀 방향에 따라 재생헤드의 자기저항이 달라짐을 이용하여 판독한다.
자기기록기술은 지난 40여년간 컴퓨터 디지털 정보저장기술로 활용되어 왔다. 이 분야의 기술발전 추이는 그야말로 경이적이다. 2kb/in² 정보저장밀도, 70kb/s 정보처리속도인 최초의 자기기록 하드디스크 RAMAC이 1956년 IBM에 의해 개발된 이후 하드디스크 자기기록기술은 지난 40여년간 정보저장밀도면에서는 100만배, 정보처리속도면에서는 1000배 이상의 기술발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정보저장밀도면에서 지난 91년 이후 매년 60%씩 증가하는 놀라운 기술성장속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우리나라 경주에서 개최되었던 제36차 국제자기학술회의(INTERMAG 99)에서 미국 IBM사와 일본 후지쯔사는 20Gb/in²(1평방인치 면적당 200억비트 저장)의 Co합금박막 하드디스크기술을 발표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평방인치 면적에 MPEG2 디지털비디오 2시간 짜리를 저장하거나 책 2500권의 정보를 수록할 수 있는 엄청난 정보저장용량이다.
자기기록 하드디스크의 정보저장밀도를 증가시키면서 대두되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초상자성 효과(Superparamagnetic Effect)」다. 이는 기록되는 비트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기록비트의 자기이방성 에너지가 작아져 열적으로 불안정하게 되어 기록된 정보가 지워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재의 Co합금박막에 의한 수평자기기록기술의 경우 초상자성 효과에 의한 정보저장밀도의 이론적 한계를 100Gb/in²로 예측하고 있다.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현재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데 자기이방성에너지밀도가 큰 FePt합금박막이나 Co계 다층박막을 이용한 수직자기기록기술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방법은 수평자기기록기술에 비해 기록막의 두께를 증가시킬 수 있어 열적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보 기록시 작은 자기장으로 기록할 수 있어 초고밀도 정보저장기록에 유리하다. 이 수직자기기록방식이 성공하면 1Tb/in²까지 정보저장밀도를 증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자기기록기술과 함께 고밀도·대용량 디지털 정보저장기술로 활발히 연구 개발되고 있는 기술이 광자기기록기술이다. 이 기술은 자기기록방식의 무제한 반복기록 장점과 광기록방식의 비접촉 기록, 디스크 제거 가능의 장점을 병합한 기술로 향후 컴퓨터 정보저장기술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기술에서 디지털 정보의 기록은 열자기 기록과정을 거쳐 행해진다. 즉 집속된 레이저광을 국소부분에 주사시켜 기록자성매체의 큐리온도까지 가열하여 자성매체의 항자력을 0이 되게 하고 이때 외부에서 300Oe 정도의 약한 자기장을 가해주어 스핀 방향을 반전시킴으로써 정보를 기록하게 된다. 기록된 정보는 선편광된 빛이 자성매체에 기록된 스핀 방향에 따라 빛의 편광 방향이 달라지는 이른바 Kerr 자기광효과를 이용한다.
현재 광자기기록디스크에는 수직자기이방성을 가진 TbFeCo 등의 희토전이금속합금박막이 주로 사용된다. 고밀도 실현을 위해 단파장 영역에서 자기광효과가 우수한 Co계 다층박막도 차세대 자성체로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자기디스크에 비해 광자기디스크의 큰 장점은 컴퓨터로부터 디스크 제거가 가능하면서 대용량의 정보를 수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초 일본 후지쯔사는 1.3GB 용량의 3.5인치 광자기디스크를 출품했는데 이는 자기기록방식의 같은 크기 플로피디스크 정보저장용량에 비해 거의 1000배나 큰 정보저장용량이다.
최근 자성체의 새로운 기술적 응용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분야가 자기메모리(MRAM : Magnetic Random Access Memories)기술 분야다. 이는 스핀이 전자의 전달현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생기는 거대자기저항(GMR)현상이나 스핀편극 자기투과현상을 이용해 메모리 소자를 구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전자는 비자성층을 사이에 둔 두 자성층에서 스핀 방향이 같은 경우보다 다른 경우의 저항이 크게 다른 현상을 이용해 GMR 자기메모리 소자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후자는 절연층을 사이에 둔 두 자성층에서 스핀 방향이 같은 경우가 다른 경우보다 전류의 투과가 훨씬 잘 일어난다는 현상을 이용, 자기투과접합 메모리 소자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이 MRAM이 성공하면 오늘날 반도체 SRAM의 빠른 속도와 고밀도의 DRAM의 장점을 겸비한 비휘발성 메모리가 실현될 것이다. 반도체 메모리 소자에 비해 전력 소모가 현저히 적고 가격도 저렴하고 생산공정도 간단한 MRAM이 새로운 메모리기술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IBM사는 현재 가장 빠른 DRAM보다 작동시간이 6배 빠른 1k비트의 자기투과접합 MRAM을 개발했고 하니웰사는 기존의 반도체 메모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든 고복사(High Radiation)환경에서도 완벽히 작동하는 16k비트 GMR MRAM 개발에 성공했다. 이런 기술발전 추이로 볼 때 21세기 초 G비트급 MRAM 소자가 개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반도체의 전하를 이용한 「전하엔지니어링시대」에서 앞으로는 자성체의 스핀을 이용하는 「스핀엔지니어링시대」가 열려 인류는 21세기 소위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라는 새로운 기술혁명에 의한 문명의 이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성체의 오랜 역사와 광범위한 응용에도 불구하고 자성체 연구와 이에 대한 학문적 이해는 다른 금속체나 반도체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 이는 자성체의 자기적 특성이 수 나노미터(㎚) 거리 정도에서 작용하는 전자 스핀간의 교환상호작용에 의한 협동현상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실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 고진공 증착기술과 표면과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나노미터 두께의 자성박막제조가 가능하게 되고 또한 이들의 인위적 제조물질에서 스핀의존현상이 발견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자성체 연구 붐이 일어나 그야말로 이 분야 연구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향후 자성체 분야 연구는 새로운 스핀의존현상에 대한 학문적 규명과 이를 이용한 스핀의존 소자를 개발하는 것이 연구의 초점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마이크로자성학을 초월해 전자스핀 교환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나노 차원에서 자성체를 제어하고 재현성 있게 제조하며 이들 나노자성체에서의 스핀거동현상을 포함한 물리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나노자성학이 학문적으로 정립돼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자성체 물질과 이를 이용한 초고속·초고밀도 스핀트로닉 소자들을 개발하는 것이 21세기 자성체 연구에 있어 새로운 과학기술적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