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16);제 2부 산업의 태동 (7)

상공부의 활약

 1960년대 중반에 들면서 정부는 비로소 국가 차원에서 전자공업에 대한 정책들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적어도 일반인에게 「전자」라는 말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정부와 산업계 역시 「전기공업」 또는 「전기기계공업」이란 일본식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금성사가 라디오·흑백TV 등을 생산해냈을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전기기기 혹은 전기제품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65년까지 우리나라의 전자공업 업체수는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6곳과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40곳 등 50개 업체가 채 못됐다. 그러던 것이 1969년에는 134개 업체로 3배 이상 증가했다. 「전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명칭을 상호로 사용한 최초의 기업은 1967년 창업한 한진전자공업(韓進電子工業)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련업체들이 급증한 것은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떠받치는 전략업종의 하나로 전자공업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펴 보인 데 따른 것이었다. 이 의지가 모아져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 정부의 전자공업 육성에 대한 의지는 상공부의 산업육성정책, 과학기술처의 종합 과학기술육성정책 등 두 갈래로 나타났다. 특히 과기처는 기반기술의 정책적 육성 필요성에 의해 1967년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정식 출범했다.(과기처 출범은 다음호에서 다루기로 한다)

 상공부에서 전자공업을 담당하는 전기공업과가 신설된 것은 1964년의 일이었다. 소속은 공업 제2국(73년부터 중공업국으로 개편)이었다. 그러나 신설 당시 전기공업과 관장업무는 전기·통신·전선·건전지·조명 등 전자공업의 외곽 분야뿐이었다. 전자공업은 공업국 기계과에서 담당했는데 기계과 업무가 주로 수입에 의존한 것이었으므로 전자부문 업무도 여기에 준하는 것이었다.

 전자공업부문 업무를 전기공업과로 끌어온 이는 1965년 말 전기공업과장이 된 이만희(李晩熙)였다. 오래 전부터 전자공업 육성에 나름대로 의지를 갖고 있었던 이만희는 1966년 초 전기공업과의 통신공업계 업무부문을 통신과 가전으로 나눈 뒤 가전분야를 전자공업계로 승격시켰다. 작으나마 상공부의 이같은 직제 개편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정부정책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한편 관련업무가 행정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계기가 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당시 상공부의 전자공업정책관련 보고체계는 전자공업계-전기공업과-공업 제2국-광공전차관보(鑛工電次官補)-차관-장관이었다. 이 계통에서 전자공업 육성에 관심을 가졌던 현직(現職)들로는 박충훈(朴忠勳. 1964∼1967년 장관), 김정렴(金正廉, 1964∼1966 차관, 1967∼1969 장관), 이철승(李喆承, 1966∼1970 차관), 이용우(李用雨, 1964∼1970 광공전차관보), 오원철(吳源哲, 1964∼1968 공업 제1국장, 1968∼1970 기획관리실장) 등이 꼽히고 있다. 이 가운데 1971년부터 1979년까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오원철은 공업 제1국장 시절 담당영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희의 「의지」를 박충훈 장관에게 직접 연결시켜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만희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전기공업과장 재직 시절 전자공업에 대한 당시 상공부 내부 분위기와 오원철과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적고 있다.

 『상역국 담당자에게…국산 개발을 위해 외제 TV수상기 견본 몇 대의 수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해도 막무가내로…벌떡 일어나 「국산 좋아하네」라며 뺨을 올려 부치지 않는가…자리에 돌아와 담당국장(공업 제2국장)에게 「뺨」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위로는 커녕 「당신같은 사람은 국가에 도움주는 인간이 못되니 한강 물에나 빠져 죽으시오. 대체 뭐가 전자공업이야, 왜 설치고 돌아다니는 거야」라고 톡톡히 기합을 받았다.

 다음날 (출근 전)…금란다방(金蘭茶房)으로 갔는데 먼저 와 계시던 오원철 공업 제1국장께서 「(전자공업은) 가까운 장래 기필코 성공할 산업이야, (담당국장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도 도와 줄께」라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날 오전 나는 TV수상기 수입 기안서를 들고 공업 제2국장과 상역국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이용우 광공전차관보, 이철승 차관의 결재를 득(得)한 후 장관실에 갔다. 박충훈 장관께서는 미소를 지으면서 「(뺨) 이야기 들었어. 잘 참았네」하면서 내용설명도 듣지 않고 성큼 결재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전자공업30년사 중 「뺨 한 대와 TV수상기 국산화」>

 1966년 전기공업과는 전자공업을 특화산업으로 지정해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이에 대비하여 산업육성 기반구축작업에 돌입했다. 이때 마련한 기반구축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 5개항이었다.

 1. 손쉽게 개발할 수 있는 품목 발굴과 국제경쟁력 있는 품목을 조사한다.

 2. 통신공업 일부를 떼어내 전자공업의 영역을 확대한다.

 3. 외국산에 대해 강력한 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하며 가능한 품목의 국산화를 유도한다.

 4. 업계 발전을 위해 전자공업협동조합의 창립을 추진한다.

 5. 정부 차원의 전자공업진흥 5개년계획을 수립한다.

 이 기반구축계획에 따라 상공부는 1966년 12월 15일 박충훈 장관을 통해 「전자제품수출 5개년계획」이 근간이 되는 「전자공업진흥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주요 골자는 전자부품의 국산 대체, 조립 및 부품공장의 분업화와 전문화, 수출원가의 절감, 기술인력의 양성, 수출시장 다변화 등이었다. 이날 발표에서 박 장관은 전자공업을 수출전략산업으로 중점 육성할 것과 함께 1967년부터 5년 동안 전자공업부문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한해 우리나라 총 수출액은 2억5000만달러, 전자공업부문만 359만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큰 반향을 일으킨 전자제품수출 5개년계획에는 금성사·동남전기(東南電機)·한국마이크로공업 등 당시 수출이 가능했던 21개 업체의 수출품목과 수출목표가 구체적으로 담겨져 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라디오와 TV 등 가전 분야에서는 금성사·동남전기·천우사(天友社)·한국마벨·아이디알공업·동화통상(同和通商)·삼양전기(三洋電機)·남성흥업(南盛興業)·중앙상역·삼미기업(三美企業) 등이,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 등 반도체 분야에서는 한국마이크로공업·시그네틱스코리아·고미산업·범한산업(汎韓産業) 등이 각각 주도적 업체로 등장하고 있다. 이밖에 브라운관은 한국전자, 축전기는 삼화전기(三和電機)·전원공업(電源工業), 크리스털·저항기·볼륨 등은 싸니전기·삼양전기·대양전자(大洋電子) 등이 맡았다. 수도피아노사는 전기기타를 수출하기로 했다.

 상공부의 「전자공업진흥 5개년계획」은 한 달여 만에 대통령에 의해 재천명돼 결정적인 힘이 실리게 됐다. 1967년 1월 17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전자공업 발전과…국산화 개발에도 힘쓸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마침내 전자공업은 국정 최고책임자의 정책의지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두 달 후 대통령 특수자문기구인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 최규남(崔奎南, 서울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 역임)과 김기형(金基衡, 초대 과기처 장관)이 정부 차원의 전자공업육성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여기서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과 전자공업센터의 설립이 처음으로 거론됐다.

 한편 대통령 연두교서가 발표되기 5일 전인 1967년 1월 12일 서울 소공동 대한상공회의소 강당에서는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이 창립식을 갖고 정식 출범했다. 상공부 전기공업과가 전자공업육성 기반구축계획을 마련한 지 불과 석 달여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조합 창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TV용 전자부품 수입에 대한 정부의 까다로운 규제정책에 반발하는 중소기업체 대표들의 불만분출이었다. 상공부는 전자제품의 국산화를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TV용 부품수입 자격을 수출가득률 40% 이상 제품의 생산자로 제한하고 있었는데 이 조치로 치명타를 입게 된 곳은 외국 부품을 들여와 완제품을 생산하려던 중소기업들이었다.

 이같은 조치는 결국 중소기업들로 하여금 민간단체를 구성하여 정부당국과 맞서는 등의 대립 양상으로 번져 나갔다. 단체 구성에 적극성을 보이던 업체들로는 나중에 창립발기인 회사로 참여한 동남전기·한국마벨·오리온전기·천우사·한국마이크로공업·수도피아노·삼미기업·삼화전기·대양전자 등이었다. 이 가운데 동남전기는 일본 샤프, 한국마벨은 미국의 RCA, 천우사는 네덜란드 필립스 등과 각각 기술제휴를 통해 1967년부터 본격적인 흑백TV 생산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때 상공부측이 낸 중재안이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의 설립 방안이었다. 이 중재안에서 상공부는 중소기업들의 의견을 상당부분 수용하되 이들이 구성하려는 민간단체의 장은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재력과 능력을 갖춘 금성사의 구정회(具貞會) 사장을 선임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협상과정에서 업체 대표격은 동남전기 전무 박청명(朴淸明), 당국 대표격은 상공부 전기공업과장 이만희와 윤정우(尹楨宇, 현 씨티아이 사장) 계장 등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을 보게된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창립발기인은 구정회 초대 이사장을 비롯, 모두 37명이나 됐다. 조합은 창립식을 갖자마자 전자공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법적 지원이 요구된다는 판단 아래 정부에 관련법의 제정 건의를 서둘렀다. 당시 과학기술처·대한전자공학회·원자력연구소 등의 협조를 얻어 마련한 것이 나중에 전자공업진흥법의 근간이 된 「전자공업진흥임시조치법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