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긴생각> 개인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

 얼마 전 2개월 가량 수염을 길러본 적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수염을 길렀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수염을 한 번 길러볼까」하는 정도의 가벼운 생각에서 그냥 놔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3주쯤 지나 어느 정도 모양이 갖춰지고나니 새삼 수염을 정말 기를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일단 몇 달 정도만 기르면서 주위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비즈니스 때문에 만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과연 나의 수염 기른 모습이 어떻게 비쳐질까 하는 것에 대해 우려 반 기대반의 생각을 가졌다.

 통상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기르지 않은 모습이 더 좋다」보다 「어울린다」는 쪽이 좀더 많은 편이었다. 그런 주위의 평가를 떠나서 신경이 쓰인 부분은 비즈니스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의 예사롭지 않은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상대로 그러한 부담스러운 관심은 보수적인 그룹에서 주로 나타났고 결국 나는 「비즈니스 하는 사람은 튀면 안되겠구나」하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하고는 2개월여만에 수염을 깎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재미난 실험을 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비슷한 헤어스타일에 같은 종류의 정장 차림이었다. 흰색 와이셔츠에 짙은 감색 아니면 검정색, 혹은 회색 정장, 넥타이에 약간의 변형이 주어지는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수 있기 때문에 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또 그런 이유로 워낙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드물다보니 새로운 시도 자체가 더 낯설고 거북하게 느껴지는 하나의 순환의 고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최고경영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에 대해서 어떻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외국의 최고경영자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공식행사에 참석할 때 대체로 정장을 입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그러한 행사에 참석할 때 항상 정장을 입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 회장은 「아이맥(iMac)」 신제품 발표회장에 찢어진 청바지와 티셔츠, 낡은 조끼에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적이 있다. 물론 수염까지 기르고 말이다.

 가장 주목받는 공식행사장에 수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의 회장이 자유로운 복장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미국 하이테크산업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IMF를 거치면서 국내 기업들은 규모에 관계없이 벤처정신이나 신지식인 열풍에 휩싸여 있다. 평생직장 대신 경쟁력 있는 신지식인을 요구하고 그런 조직원들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주력하는 요즘, 2개월여간의 개인적인 실험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아직은 이런 「튐」이 쉽게 용인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만 해도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여름에는 넥타이 없는 흰색 반팔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모두 유니폼처럼 입고 있었다. 또 몇몇 중소기업들이 다른 모습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이 정장 차림과 여성 직원의 유니폼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청와대의 고급 공무원들부터 청색 와이셔츠에 노란색 넥타이를 매고 있고 기업도 주말 자유복을 허용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면접관이 싫어할까봐 긴 머리를 자르고 입사 면접을 보는 여성들이 있고, 우리 회사와 같이 복장제한이 없는 기업에서도 국내 정서상 대외관계를 위해서는 정장을 회사에 두고 외출할 때마다 꺼내 입어야 하는 실정이다.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에서 이제는 모든 사람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형식보다는 그 안에 담겨질 실질적인 내용과 그 가치를 판단해야 할 때다. 나는 언젠가 수염을 기르는 것이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는 때가 되면 꽁지머리를 묶어볼까 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허진호 아이네트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