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희의 등장
미국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주임교수였던 김완희(金玩熙)가 박충훈(朴忠勳, 대통령 권한대행 역임) 상공부 장관의 초청을 받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1967년 9월 4일. 뉴욕을 떠나기 전 초청장을 전해준 워싱턴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은 초청장은 장관 명의지만 사실은 「각하의 뜻」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초청 목적은 산업육성 방안에 대해 자문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김포공항에서 상공부 공업제2국장의 안내를 받아 상공부 청사에 도착해 보니 박충훈 장관, 이철승(李喆承, 상공부 차관 역임, 작고) 차관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장관은 김완희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한국 전기기계공업(당시는 전자공업이라는 말이 공식용어가 아니었다)의 실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일본처럼 이른 시일내에 육성할 수 있는 정책을 세우려고 하니 도와 달라고 말했다. 이어 박 장관은 우선 관련연구소와 생산공장 등을 직접 둘러본 다음 대통령에게 보고할 자료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완희는 다음날부터 이철승 차관의 안내로 한국전력·대한전선·금성사 등 기업과 중앙전파연구소·중앙공업연구소 등을 둘러보았다. 김완희는 최근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한국의 전자공업 실태를 이렇게 기억했다.
『서구와 비교하면 한마디로 원시적이었다. 정밀전자공업까지도 수작업 단계에 있어 생산되는 전자부품은 지독하게 조잡했다. 업계의 맏형격이라는 금성사조차도 홍콩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뜯어 안을 들여다 보는 소위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국산 라디오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김완희 회고록, 「두개의 해를 품에 안고」 1999 동아일보사
나흘 동안의 산업시찰에 이어 상공부 전기기계공업과 전자공업계장 윤정우(尹楨宇, 현 전자정보기술인클럽 상근 부회장),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상무 이태구(李太九, 작고) 등과 함께 브리핑 자료를 만들기까지는 열흘 이상이 소요됐다. 1967년 9월 16일 마침내 김완희는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 날 김완희가 박 대통령에게 브리핑한 보고내용은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였다. 배석자는 박충훈 장관, 신범식(申範植, 문공부 장관 역임, 작고) 대변인, 추인석(秋仁錫, 한국은행 금통위원 역임), 한준석(韓準石, 해운항만청장 역임) 비서관 등이었다. 전자공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최고 통수권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전문가로부터 산업육성정책 방향을 보고받는 역사적인 일이였다. 김완희의 브리핑이 계속되는 동안 대통령은 꼼짝도 하지 않을 만큼 진지했다고 한다. 차트 브리핑임에도 불구하고 꼬박 두 시간 정도 소요됐다.
모두 7개항으로 된 이 건의서에서 김완희는 우리나라가 전자공업에 대한 적응성이 우수함을 열거하고 수출전략산업으로 지정해줄 것과 함께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또 우리나라가 당면한 15개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완료되는 1971년까지 전자공업육성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관련법의 제정,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전문기관으로서 전자공업진흥원의 설치, 전자공업육성자금의 확보와 조기 방출 등을 건의하였다. 전자산업발전사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의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
1967.9.16 김완희
1. 전자공업의 분류(생략)
2. 전자공업의 특징 및 적응성(생략)
3. 전자공업의 발전단계와 한국의 위치
제1단계 : 가정용 및 지상용 통신전자기기의 제조(한국, 초기단계 진입)
제2단계 : 컴퓨터, 기업합리응용 및 우주통신용 전자기기의 제조(일본, 초기단계진입)
제3단계 : 자동화의 일상 생활화(미국, 초기단계 진입)
4. 한국 전자공업의 현황 및 전망
(1)현황 : 전자기기의 생산·조업 상태는 단순조립공정 정도에 그치고 있으며 기본 부품 및 원자재의 국산화는 미약한 실정.
(2)전망 : 시대의 추세에 따라 국내외 전자공업제품 수요는 크게 증가할 것임. 수출전략상품으로서 가정용 전자기기 및 동 부품에 대한 우선 지원이 따라야 할 것임.
5. 한국 전자공업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
(1)연구개발의 저조-가정용 전자기기는 모방조립 정도, 전자부품·재료 개발은 전무, 기술개발비에 대한 세제상의 혜택 전무.
(2)대다수 기업의 영세성-금융지원이 절실함.
(3)연구·시험기관은 있으나 산업개발의 실효성으로 이어지지 못함.
(4)해외 기술 및 시장에 관한 정보수집 분석활동 미비함.
(5)현 내수 규모로는 양산체제 공장의 존립, 산업계열화·전문화·국산화 등이 난망함.
(6)강력한 품질검사제도 및 기관이 없어 상호 불신감 조성과 대외 신뢰도 저하-수출검사법·품질관리법·공업표준화법·중소기업협동조합법 등 강화.
(7)전자공업 육성을 위한 법적 뒷받침이 없음. 무역거래법·관세법 등의 조정이 요구됨.
(8)정책수립 및 기업들에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전문기관이 없음.
(9)외국인 기업에 대응할 수 있는 재벌급 기업이 없음.
(10)기술자·기능공 양성에 대한 근본 대책이 없음.
(11)안정적인 전력공급체계의 미비.
(12)기획·관리·조직 등에서 기업합리화 미비.
(13)고부가가치의 전자제품을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제도적·사회적 관습(과다한 물품세).
(14)산학협동이 긴밀치 못함-대학 전자공학과의 증가 및 신축성.
(15)수요에 부응키 위한 원자재 및 제품 비축체제가 이뤄지지 못함.
6. 건의사항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최종연도인 1971년에 다음 사항을 달성할 것을 목표로 함.
(1)3항의 제1단계 생산체계 완수.
(2)3항의 제2단계 진입을 위한 핵심요소(반도체소자·집적회로)의 연구개발, 제조.
(3)전자제품 생산 1억5000만달러, 수출 1억달러.
(4)국방용 기기 가운데 무선통신기기의 공급력 확보.
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건의함.
(1)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주요 내용)
①진흥대상품목(기기·부품·재료)의 지정 및 계획생산·수급체계의 확립.
②계획생산체제를 위한 자금지원(융자), 자금지원시 담보조건 완화.
③검사제도 및 설비 현대화(자금지원).
④연구 및 개발비 지원(기술개발비 면세), 연구개발기관 보조금 지급.
⑤지정품목에 대한 면세 및 감세.
⑥제조설비에 대한 감가상각.
⑦기술자의 양성.
⑧국산화 및 산업계열화 조성.
⑨수출의 장려.
⑩전자공업진흥심의회 설치.
(2)전자공업육성자금 확보와 조기 방출(시설·운영자금, 신기종 개발자금의 융자, 연구개발비 등).
(3)전자산업진흥원의 설치(내용생략)
7. 효과
(1)수출증대-1억달러.
(2)수입대체-3500만달러.
(3)국산화율-가정용 기기 90% 이상, 부품 80% 이상.
(4)고용증대-2만명 이상.
(5)연관 효과-기계·금속·화공 분야의 원자재공업 유발.
(6)공업체제정비-모(母)제품공업과 부품공업의 계열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건의서에서 김완희가 주장한 전자공업진흥법은 1968년 12월 28일 동명의 전자공업진흥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전자공업진흥원 설치안 역시 1976년 한국전자공업진흥회(현 한국전자산업진흥회)의 출범으로 빛을 보게 됐다.
브리핑을 마친 직후 이어진 오찬에서 박 대통령은 김완희에게 『미국 모토롤러가 한국에서 이것을 만들겠다고 공장부지 매입 허가를 내달라』고 하면서 선반에서 뭔가를 내려 보여주었다. 보기에도 생소한 몇개의 트랜지스터 부품이었다. 『한개에 20∼30달러 한다면서 손가방 하나면 몇만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니, 철도 화물차로 날라도 몇십만달러밖에 안되는데…. 그래서 내가 김 박사를 보자고 한 것이오.』
김완희를 박 대통령에게 추천한 사람은 청와대의 한준석·추인석 비서관이었다. 1967년 당시 두 비서관은 전자공업육성정책을 수립할 적임자로 김완희와 최형섭(崔亨燮, 과기처 장관 역임) 두 사람을 추천했다고 한다.
김완희는 당시 명문 컬럼비아대로부터 종신 정교수직을 제공받고 미국정부 차원의 각종 연구 프로젝트를 도맡아 추진하는 등 세계적 권위를 가진 공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학문적 성과보다는 지위를 중시하던 국내에서 그는 미국 동부 명문 8개 대학을 이르는 아이비리그 최초의 한국 출신 주임교수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컬럼비아대에서 그를 높이 산 것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한 성과 때문이었다. 1926년 경기도 오산 출신인 김완희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대에서 1956년에 받은 박사학위의 논문 주제는 「브루니의 정리에 대한 예외」였다. 이 논문은 오늘날 전자공학 분야의 기초 발견 가운데 하나로서 전자회로 설계에 중요한 표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형섭 역시 1966년 2월 출범한 KIST의 초대 소장으로서 당시 한국의 젊은 두뇌를 대표하고 촉망받던 과학자였으나 그의 전공분야는 원자력이었다. 박 대통령이 이 둘 가운데 전자공업육성정책을 수립할 적임자로 김완희를 지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테면 대통령은 최형섭을 기초과학분야의 책임자로서, 김완희를 응용분야인 전자공업의 책임자로서 각각 지목해 놓고 있었다.
1967년 9월 16일 청와대 브리핑을 계기로 김완희는 박 대통령이 살아 생전 13년 동안 13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면서 한국 전자산업 발전의 대부(代父)로 우뚝 서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