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19);제 2부 산업의 태동 (10)

김완희 보고서

 1967년 9월 16일의 청와대 브리핑이 있은 후 김완희(金玩熙)는 상공부로부터 전자공업진흥원 설립을 위한 예비조사를 위촉받고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3월 김완희는 미국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자공업진흥원 설립을 위한 조사단을 이끌고 다시 서울에 왔다. 이 조사단에는 김완희가 소속돼 있던 컬럼비아대 공과대학 W J 헤네시 학장, 음향·오디오 분야 권위자 C M 해리스 교수, 시장조사 전문회사인 체이스사의 하워드 체이스 사장, 방위산업체인 하버드 인더스트리의 W 헐리 사장 등 당시 전자공학 및 전자공업계의 세계적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에 앞서 1968년 초 최형섭(崔亨燮, 과기처 장관 역임)이 이끄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연구원들이 김완희의 요청에 의해 정부 차원의 전자공업현황 조사작업에 나섰다. 1월 25일부터 3월 10일까지 계속된 이 조사에는 당시 KIST 최고 두뇌들로 꼽히던 정만영(鄭萬永, KIST 부소장 및 삼성반도체통신 부사장 역임)·심문택(沈文澤, KIST 소장 및 국방과학연구소장 역임)·윤용구(尹容九, 원자력연구소장 역임, 현 동원대학 학장) 등을 비롯, 대한전자공학회 회원이던 연세대 양인응(楊仁應, 광운대 총장 역임) 교수,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의 이태구(李太九, 작고) 상무 등이 참여했다.

 KIST의 조사보고서는 국내 전자공업이 처해 있는 경제적 상황과 기술적 상황 그리고 성장을 위한 여건분석 등 크게 3개 부문으로 구성돼 있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현황>

- KIST

 1. 경제적 현황

  1) 주요 지표 : 한국의 전자공업부문 생산량은 70억원(1967년), GNP 비중은 0.19%(1965)로서 이는 1930년 초반 미국의 경우와 비슷함. 라디오·전축의 경우 내수의 60%, TV는 35%를 각각 해결. 수입 1963년 이후 매년 500만달러 내외, 수출은 261만달러(1967년 상반기만)로 급속 증가. 최대 시장인 미국의 경우 극동 수입량은 5억달러인데 한국 비율은 0.35%(1966)로 아직은 매우 낮음.

  2) 생산성 : 원자재 수입의존도가 45% 이상이지만 수출을 전제로 한 수입이므로 혜택 불가피함. 노동집약적인 특성으로 고부가가치산업의 특성을 갖고 있음. 부가가치율은 43%.

  3) 1960년대 전자부품시장과 국산화율 현황

 2. 기술적 현황

  1) 시설 : 대부분의 작업장이 비능률적이고 협소하며 영세함. 기계설비는 거의 반자동식이며 작업은 완전 수동. 천연원료는 우수하나 활용이 미흡하고 금속재료공업의 낙후로 원자재 개발 전무함.

  2) 제조공정 : 대부분 조립공정이며 일부 컨베이어 기반의 선형(線型) 작업이 운용중. 공정배치가 비능률적이고 기능공의 육감적 수리에 의존함. 안전조치 미비.

  3) 품질과 기술 : 라디오 등은 외제와 비슷하나 내구성 부족(KS규격은 없었음). 대부분 도입부품으로 큰 결함 없으나 저급이어서 전반적 품질 저하. 외국인 직접투자기업은 10개사며 대부문 반도체소자 생산(1967). 국내 총 43개사 중 9개사가 일본과 기술제휴.

 3. 성장을 위한 여건 분석

  저급의 가전공업이 극동지역 저임금국가로 급속 확대되고 있음-한국은 노동력, 미세공정에 대한 기후풍토적 조건이 매우 양호함. 그러나 수출전략상품으로 중점 육성되는 것과 달리 정보수집활동이 미흡함. 산업 특성상 재벌급 기업의 참여가 요구됨.

 KIST의 보고서는 김완희가 이끄는 미국인 조사단의 조사활동 근거가 됐다. 조사단은 국내에 10일 동안 머물면서 이 보고서에 준해서 전자공업진흥원의 설립과 활동방향을 정해 나갔다. 김완희가 이때의 조사활동자료를 토대로 4개월여에 걸쳐 작성한 문건이 바로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다. 1967년 9월 16일 1차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건의서」(지난 호에서 소개했음)가 첫 운을 뗀 일종의 서론이었다면 이 문건은 본론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 골자는 전자공업진흥원(전자공업진흥센터로도 지칭됐음)의 설립 방안과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해 줄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자공업진흥원의 역할은 시제품 등 신제품을 직접 만들어 기업에 넘겨주며 해외시장 개척에 직접 나서는 일이었다. 또 일본에 편중돼 있는 기술제휴선을 구미지역으로 전환시키는 역할과 함께 기업들의 과당 경쟁의 조정, 품질검사 및 품질고도화 등을 주도케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기업들은 진흥원이 개발한 시제점이나 신제품을 상품화하여 생산하는 일에만 전념하면 됐다.

 김완희의 의도대로라면 전자공업진흥원의 설립은 이를테면 수많은 제조기업을 거느린 연구·마케팅전문 공기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건의서」에서 언급했던 「재벌급 기업의 참여 요망」과 맥을 같이하며 앞서 소개했던 KIST보고서에서도 그대로 인용돼 있다.

 김완희가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은 1968년 8월 1일이었다. 이 보고서는 원래 4권 1000쪽이 넘는 방대한 규모로서 미국 현지에서 영문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25명의 번역가가 워커힐호텔에 진을 치고 한글로 번역하여 차트용으로 요약하는 데 2주일이 걸렸다. 전지(A1)크기 80장의 차트로 재구성하는 데 7명의 일류 차트사들이 동원됐다.

 오전 9시부터 12시 30분까지 계속된 이날 브리핑에는 김정렴 상공부 장관, 신범식 대변인, 신동식 경제수석, 김동수 비서 등이 배석했고 전자공업을 담당하는 상공부 공업제2국장 박임숙(朴林淑)이 땀을 뻘뻘 흘리며 차트 넘기는 일을 맡았다. 현재 청와대에 원본 상태로 보관돼 있는 이 보고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발췌)>

-공학박사 김완희

 ·제1권-제1부 외국 산업개발 정책의 개요와 분석

 푸에르토리코·아일랜드·대만·일본·인도·서독 등 9개국 전자산업 개황과 정부정책 소개

 ·제2권-제2부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세계시장 분석

 부분품, 일용 전자, 공업용 전자, 전자계산기, 의료전자기기, 군사용 전자, 제조업(조달·생산·배달)

 ·제3권-제3부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건의

  1)정부시책(감세·자금제공·경비감소대책·합작투자/직접투자유치·기술자 확대)의 추진

  2)특별입법(전자공업진흥법) 조치와 단일운용기구(전자공업진흥원)의 설치

  3)기술정보교환 및 품질향상과 검사(수요자의 구매의욕과 대조)

  4)훈련 및 교육(경영자재교육·기술자양성·대국민홍보), 한국인 재외기술자 본국 유치

  5)외국기술 라이선스 도입과 관리지침 마련

  6)진흥과 판매(판매기술요원의 필요성과 훈련), 군사용 전자공업 능력의 개발

 ·제4권-제4부 전자산업진흥원 역할과 설립에 관한 구체적 방안

  1)강력한 조직구조(관리·기구·권한·육성)

  2)생산품 개척과 발전 주도(전자기기의 범위와 기술수준의 결정, 전자제조개발5개년계획)

  3)시범공장의 설치, 품질조정 및 검사방법과 장비도입, 기술훈련 및 기술요원 양성

  4)외국기술관리 및 시장조사

  5)전자관 제조시설의 설치(흑백·유색 브라운관시설 설치의 필요성)

  6)교육용 TV망의 운용(TV를 통한 집단교육기구 마련)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는 김완희가 제2대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장(1978∼1982)에 취임함으로써 전자공업정책 전면에 나서기까지 15년 동안 한국 전자공업의 확장기 때 일종의 복음서로 통했다. 전자공업의 기반구축에 대한 방향과 기업인들의 전자공업에 대한 신규투자 지침서 역할을 했고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을 포함하여 상공부·과기처 등 정부 부처의 정책입안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작 이 건의서의 핵심인 전자공업진흥원의 설립안은 1976년 한국전자공업진흥회의 출범 때까지 미뤄졌다. 김완희는 이 건의서에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완료되는 1971년까지 진흥원의 설립을 마쳐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박 대통령은 진흥원을 이끌 적임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설립 추진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이에 대해 김완희는 최근에 펴낸 회고록 「두개의 해를 품에 안고」(1999, 동아일보사)에서 박 대통령은 진흥원 책임자로서 자신을 지목했으나 컬럼비아대학 교수직 때문에 이 제의를 거절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사람이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자공업30년사」(1989, 한국전자공업진흥회)에 따르면 『…대통령은 진흥원 설립은 적임자를 찾을 때까지 연기하고 우선적으로 기존의 기관을 활용토록 하라는 결정을 내렸다』라며 기존 기관의 활용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1976년 한국전자공업진흥회의 설립 때까지 전자공업진흥원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지정된 곳은 국립공업시험연구소·KIST·한국정밀기기센터(FIC) 등 세 곳이었다. 전자공업진흥법에 따라 이들 세 기관은 전자공업진흥자금을 받아 해당분야에서 전문업무를 개발하는 등 전자공업발전의 전면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