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21);제 2부 산업의 태동 (12)

이병철의 등장

 1969년 6월 30일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긴급이사회를 열고 청와대 등에 보낼 「삼성전자와 일본 산요전기간 합작투자에 관한 진정서」를 금성사·삼화콘덴서 등 57개 회원사 명의로 채택했다. 삼성물산이 일본의 산요전기(三洋電機) 및 스미토모상사(住友商事) 등과 합작투자하는 삼성산요전기(三星三洋電機)의 출범을 저지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이때 삼성산요는 일본 산요의 자본 및 기술지원을 통해 한국에서 TV와 라디오 등을 생산하여 85%는 수출, 15%는 내수시장에 공급한다는 사업계획을 세워 놓고 정부측 인가만을 기다리고 있던 가설립 상태였다.

 이에 앞서 국제신보는 6월 26일자 조간에서 『정부가 삼성과 산요의 합작투자를 인가한다면 과당경쟁의 격화를 촉발하여 결국 기존 업자를 죽이는 일이 될 것』이라는 사설을 내보내 전자공업협동조합 회원사들의 사기를 충천시켰다. 그러자 중앙일보가 26일과 27일자 석간에 삼성그룹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이름으로 된 「전자공업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글을 상·하편에 나눠 싣고 대응에 나섰다. 이 글에서 이병철은 『삼성이 전자공업 분야에서 계획하고 있는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는 연간 생산고가 (1967년의 3600만달러에서) 7000만달러에 달하고 그 90%를 수출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공장을 세우는 데는 2000만달러 내외면 족하고…』라며 삼성의 전자공업 신규 진출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병철은 삼성물산과 함께 중앙일보와 동양방송(TBC)의 회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병철의 기고문에 1차로 경악한 곳은 조선일보 등 신생 중앙일보의 급신장에 긴장해 있던 기존 언론사들이었다. 6월 28자 조선일보는 「국내업계 크게 반발」, 서울신문은 「타격받을 기존업계 펄쩍」이라는 기사를 내보내 삼성을 압박했다. 다시 7월 1일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삼성·산요 합작투자사업에 대한 반대 진정」이라는 광고를 동아일보에 실어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한 모닥불에 기름을 끼얹고 말았다.

 삼성산요전기 출범에 대한 반대 진정은 1959년 태동 이후 10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국내 전자산업계에 처음으로 불어닥친 역풍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싸움은 사실 전자산업계 후발인 삼성가(家)의 도전장에 선발인 금성가(家)가 제동을 거는 성격의 것이었다.

 당시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구인회(具仁會) 락희그룹 회장의 셋째 아우자 금성사 사장이던 구정회(具貞會)였고 이 문제를 처음 보도한 국제신보 역시 구인회가 대주주였다. 이전에 구인회는 라디오와 TV생산이 주력이던 금성사 경영을 위해서는 계열 방송사가 필요하겠다는 판단 아래 이병철과 합작투자로 TBC를 설립하고 라디오방송은 삼성이, TV방송은 락희측이 소유하기로 했다가 결국은 TV방송까지 모두 삼성에 넘겨준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병철의 언론사 경영은 결과적으로 삼성산요전기의 출범을 염두에 둔 사전 포석이 됐다. 5·16 이후 구인회가 건실한 기업가로서 전자·화학·정유사업 등에서 승승장구하던 반면 이병철은 1964년 2월의 삼분(三粉)폭리사건과 1966년 9월의 한비(韓國肥料) 사카린밀수사건에 직접 연루돼 기업인으로서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주춤거리던 상황이었다.

 삼분폭리사건이란 밀가루·시멘트·설탕 등 분말(粉末)제품을 생산하던 대한제분(동아그룹)·대한양회(개풍그룹)·제일제당(삼성그룹) 등 3개 재벌계열사가 유통과정을 조작하여 폭리를 취했다 해서 정치적 문제로까지 비화됐던 일이었다. 이어 폭로된 사카린 밀수는 삼성계열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인 OTAS를 몰래 들여오다 언론사의 보도로 알려진 60년대 최대의 재벌비리사건. 박정희 대통령까지 공식석상에서 『재벌 밀수는 반국가 행위』라며 국민 앞에 엄벌을 다짐하는 등 그 파장이 예상외로 확대되면서 삼성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두한(金斗漢) 의원의 그 유명한 국회 오물투척사건도 이때 일어났다.

 이병철은 결국 1966년 9월 23일 기자회견을 갖고 밀수사건을 사죄하는 뜻에서 한국비료의 지분 51%를 정부에 헌납하고 중앙일보와 TBC 등 언론사업과 대구대학 등 학원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이병철은 언론사업에 이어 주력인 삼성물산의 경영에서도 2선으로 물러났다.

 이병철이 대국민 약속을 깨고 삼성물산과 중앙일보 및 TBC 회장에 복귀한 것은 불과 17개월 만인 1968년 2월이었다. 복귀와 함께 이병철은 삼성물산에 개발부를 신설하고 상무 신훈철(申勳澈, 삼성전자·삼성산요·삼성항공·삼성코닝 사장 역임, 현 성우회 회장)에게 한국비료의 경영 공백을 메울 신규사업 개발을 지시했다. 2개월 후 신훈철은 전자산업이 가장 유망한 분야라고 보고했고 우선 라디오와 TV 등 민생용 전자기기 제조를 통해 경험을 쌓은 뒤 전자교환기 등 산업용 전자로 사업을 확대해 간다는 윤곽까지 그려냈다. 이때가 1968년 6월.

 이즈음 이병철은 평소 친분을 가졌던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의 미즈가미(水上達三) 회장 주선으로 도시바(東芝)와 마쓰시타(松下) 등 일본 전자회사 경영진들과 접촉하면서 합작투자와 기술제휴선 모색에 나섰다. 이병철의 제의에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이가 산요전기의 이우에 도시오(井植歲男) 회장이었다.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우에 회장이 『전자산업은 모래가 원료인 실리콘 칩에서부터 TV에 이르기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부가가치 99%의 창조산업』이라며 자신의 전자산업 진출 결심을 굳혀줬다고 적고 있다.

 이병철의 결심을 재삼 굳혀준 또 다른 인물 하나가 바로 컬럼비아대학 교수 김완희(金玩熙)였다. 김완희는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를 보고하기 위해 세번째로 서울을 방문했던 1968년 8월 이병철을 찾아가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을 크게 환영한다고 말했다. 김완희가 대통령에게 보고한 각종 문건에서 재벌급 기업의 전자산업 참여건의는 결과적으로 삼성을 염두에 둔 것이 돼 버렸다.

 밀수사건이 잠잠해지고 사업방향이 구체적으로 잡히자 이병철은 1969년 1월 13일 그동안 삼성물산 개발부에서 추진하던 전자사업을 전담할 수권자본금 6억원의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정식 발족시켰다. 이병철 자신과 제일제당 사장 김재명(金再明), 안국화재 사장 손영기(孫永琦), 삼성물산 부사장 이맹희(李孟熙), 전 삼호방적 사장 정상희(鄭商熙), 삼성물산 사장 정수창(鄭壽昌), 동방생명 사장 조우동(趙又同) 등 7명이 발기인이 됐고 초대 사장에는 정상희가 선출됐다. 그러나 출범 당시 삼성전자는 개발과 제조가 아닌 전자제품의 위탁판매와 기획업무만을 담당하는 조직으로서 인원도 20명 미만의 소기업이였다. 1970년 1월 정상희 사장이 삼성물산 사장을 겸하면서는 삼성물산 전자부로 재통합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존재 가치를 제공해 준 회사는 바로 삼성산요전기였다. 정부에 제출한 인가신청서에서 삼성산요는 연간 TV 30만대, 라디오 410만대, 스피커 3600만개, 콘덴서 2만5000개 등을 생산하겠다고 적시하고 있었다. 1969년 5월 20일 삼성물산과 일본 산요전기는 삼성산요의 설립 의정서와 그 부속문서에 최종 합의하고 수권자본금 1200만달러 가운데 삼성이 50%, 산요가 40%, 스미토모가 10%씩을 불입키로 했다. 초대 사장으로 내정된 김재명은 수원과 울주 등 두 곳에 생산공장 건설을 추진하는 한편, 6월 13일 한국정부에 합작투자회사 설립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니까 금성사를 발칵 뒤집히게 한 것은 정확하게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요로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크게 두가지의 이유를 들어 삼성산요의 출범을 반대했다.

 첫째는 수출산업을 빙자한 외국자본의 유입이 결과적으로 국내 전자산업에 과당경쟁을 불러일으켜 공멸의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산성산요가 제출한 계획서 중 생산량의 85%를 수출하겠다는 것에 대한 강제 규정이 없는 데다 약속대로 15%만 내수에 돌린다 해도 공급과잉현상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삼성산요의 자본과 시설은 매판(買辦)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정부가 이를 허용한다면 결국 민족자본으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업종에 대해서도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는 셈이 된다는 이유였다.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이어 만약 정부가 삼성산요를 인가할 경우 외국인 합작기업이라는 시각에서 보아 내수를 전면 금지시킬 것, 수입원자재는 반드시 역수출용으로만 허가할 것, 기존 국내 부품 계열화업체를 최대한 활용토록 해줄 것 등 세가지를 진정하였다. 요즘 같아서는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이 진정서에 대해 정부는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한·일국교정상화 대가, 국군의 파월(派越) 대가, 미국계 다국적 자본 등을 마구 들여와 경제개발에 쏟아붓던 상황에서 삼성의 계획은 별 하자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벌, 특히 삼성에 대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1969년 9월 정부는 결국 생산 전량을 수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삼성산요전기의 설립을 인가했다. 정부는 또 같은 기간에 삼성이 일본전기(NEC) 및 스미토모상사와 50 대 40 대 10의 지분으로 설립을 신청한 삼성NEC(현 삼성전관)도 생산제품(진공관 및 브라운관)의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인가했다. 삼성산요전기는 1969년 12월 4일, 삼성NEC는 이듬해 1월 20일 각각 정식 출범했다. 이로써 삼성은 1970년대 금성과 본격적인 「별들의 전쟁」을 벌일 채비를 갖추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