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22);제 2부 산업의 태동 (13)

전자공업진흥법

 1960년대 한국의 전자산업을 결산하는 최대의 수확은 역시 1969년 1월부터 시행된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이라 할 수 있다. 16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이 법은 전자산업을 국가 중추산업으로 진흥함으로써 산업설비 및 기술의 근대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케 한다는 것이 제정의 취지였다. 1959년 금성사의 진공관라디오 개발이 있은 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전자공업진흥법은 컬럼비아대 교수 김완희(金玩熙)의 누차에 걸친 조사보고서와 당시 유일한 민간단체였던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의 대정부 건의 등이 조문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 법이 제정됨에 따라 정부는 비로소 본격적인 전자산업진흥시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그 가운데서도 상공부는 중점 육성대상 품목을 지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전자산업 육성 주무부처로서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전자공업진흥법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무 장관인 상공부 장관의 권한과 임무가 매우 강력하고 구체적임을 알 수 있다. 이 법에 따라 상공부 장관은 중점 육성이 필요한 전자기기 품목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제3조)과 이 권한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전자공업진흥기본계획 수립 임무(제4∼6조)가 주어졌다. 이때 장관이 지정할 수 있는 중점 육성대상 품목은 관련기술의 국산화, 업계의 전문화와 양산화, 성능과 품질의 개선 등이 요구되던 것들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민간업계에 대한 상공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근거이기도 했다.

 장관은 또 성능과 품질보장이 필요한 기기에 대해 품질검사를 실시(제8조)하며 기술개발과 해외시장 개척 등에 필요한 시책을 강구할 것(제10조)도 규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수출 촉진을 위한 전자공업단지의 조성(제11조)과 필요할 경우 관련기관과 단체로부터 보고를 명할 수 있는 권한(제13조)도 가졌다. 장관의 자문에 응해주는 15인 이내의 「전자공업심의회」를 설치할 수 있는 권한(제12조)도 주어졌다.

 이에 대해 민간 업계는 이 법의 시혜를 받기 위해서는 상공부령에 따라 업체등록의 의무(제7조)가 주어졌고 정부는 장기 저리의 전자산업진흥자금을 조성해야 한다는 규정(제9조)을 두었다.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공포와 동시에 정부는 이 법 제4조에 의거해서 수립한 중장기 진흥기본계획인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되는 1976년까지 정부의 전자산업진흥계획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일종의 백년대계였다. 핵심 골자는 8년의 계획기간 동안 총 140억원의 진흥자금을 투자하여 마감 년도인 1976년에 전자산업부문 수출액이 4억달러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서 전자산업진흥의 3대 목표는 중점육성 대상 품목의 개발(국산화), 수출목표의 달성, 국산화의 단계적 제고 등으로 정해졌다. 구체적 진흥방안으로는 기기·부품·재료간 제조계열화를 통한 산업개발체제의 확립, 수출전략산업으로서의 육성, 진흥기금의 조성 등이 제시됐다. 상공부는 이 계획에 따라 우선 전자기기 54개, 전자부품 29개, 전자재료 12개 등 모두 95개 품목을 진흥대상으로 지정하고 1969년부터 1971년까지 1단계, 1972년부터 1976년까지 2단계로 나눠 육성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1단계 진흥대상 품목으로는 저항기·축전기·스피커·브라운관·트랜지스터·집적회로·튜너 등 부품과 반도체·라디오·TV·레이더·오실로스코프·심전계 등 민생용 및 산업용 전자기기 등이 포함됐다. 또 2단계 품목으로는 마그네틱헤드·전자복사기·TV카메라·중형컴퓨터·전자현미경 등 첨단기기와 에폭시수지·실리콘적층 등 재료들이 포함됐다. 이들 품목은 각 단계마다 다시 제조기술개발 분야와 양산체제 분야로 구분해서 대상 업체를 지정한 다음, 진흥기금을 지원하거나 융자를 알선하는 방법 등이 동원됐다.

 8개년 계획을 주도할 진흥기관으로서 김완희가 줄곧 주장했던 전자공업진흥원(일명 전자공업진흥센터)의 설립에 관한 것은 제외됐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기존의 세개 기관을 적극 활용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고 지난호에서 설명한 바 있다. 대통령이 대안으로 지목한 세개 기관은 한국정밀기기센터(FIC), 국립공업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등이었다.

 세개 기관 가운데 8개년 계획을 사실상 주도한 곳은 FIC였다. 우리 정부와 유엔 산하기구인 유네스코(UNESCO)간 공동산업협정 체결에 의해 1966년 발족된 FIC는 전자산업정책 수립을 위한 통계, 관련업체 등록, 기술인력 및 기능공의 양성, 해외시장 개척 등의 업무를 맡았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미국보험협회안전규격(UL)을 비롯,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 독일전기기술자협회(VDE), 캐나다표준협회(CSA) 등 유명 해외 표준규격 인증 업무도 대행했다. 1969년에는 대외 이벤트로서 한국전자전람회(KES)와 전국라디오조립경연대회 등 전국규모 행사를 창설하기도 했다. 매년 10월 개최되는 KES는 역대 대통령이 직접 개막 테이프커팅행사에 참여함으로써 전자산업에 대한 국정 최고책임자의 의지와 관심을 표명하는 행사로서 자리매김했고 현재까지도 국내 최대 규모 종합전자전시회로서의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FIC 활동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역시 해외시장 개척부문이었다. FIC는 전자공업진흥기관으로 지정된 직후인 1969년 7월과 1970년 7월 잇따라 뉴욕과 도쿄에 해외사무소를 설치하고 해외시장조사 및 수출진흥 활동에 나섰다. 당시 해외 FIC사무소에서 수행했던 주요 업무는 기술정보 및 시장조사, 자본 및 기술의 도입과 유치, 수출진흥 및 홍보 등이었다. 뉴욕과 도쿄사무소의 활동이 성과를 거두자, 1971년부터 거점을 샌프란시스코와 본 등으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FIC는 또 1969년 11월 한국규격협회 이재곤(李載坤) 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15명의 전자공업기술조사단을 구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한달여 일정으로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싱가포르·대만·일본 등의 전자산업계를 둘러보게 했다. 이 조사단의 목적은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에 의거해서 1976년에 4억달러의 수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2억달러 정도의 외자 유치와 반도체공장 설립 등에 따른 기술 도입을 위한 자료수집이었다.

 전자산업 분야에서 해외시찰단은 FIC의 조사단에 앞서 1967년 10월의 일본전자공업시찰단이 원조로 기록돼 있다. 국립공업연구소 연구원과 동아전자·동남전기·우신화학 등 업계의 간부 15명으로 구성된 이 시찰단은 대만과 홍콩 등에 진출해 있던 일본기업들의 한국 진출을 도모케 한 성과를 거뒀다. 일본시찰단의 파견은 이보다 한달 앞서 내한했던 일본업계의 한국시찰단에 대한 교환방문의 성격이긴 했다. 시찰단 맞교환을 계기로 양국 전자산업계는 기술제휴와 국제분업 등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두번째 시찰단은 1968년 3월에 파견된 미국전자공업시찰단이었다. 김완희 주선으로 이뤄진 이 시찰단은 구정회(具貞會) 금성사 사장을 단장으로 오동선(吳東善) 삼화전기 사장, 김문주(金文周) 삼미기업 사장, 김성재(金聖在) 중앙전기공업 사장 등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회원사들이 대거 참가했다. 20일간의 기간 동안 시찰단은 실리콘 기반의 집적회로(IC)가 전면에 부상하고 게르마늄 트랜지스터 등은 해외 저임금 국가의 공장으로 이전되면서 산업의 2선으로 물러나고 있는 미국 전자산업계의 기술동향을 분명히 간파할 수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삼성그룹이 일본전기(NEC)와의 합작으로 진공관을 생산한다는 계획을 입안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FIC의 해외조사 및 시장개척 활동은 이같은 민간 해외시찰단의 성과가 바탕이 됐다.

 FIC는 1979년 업체등록과 산업진흥 관련조직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와, 연구개발 조직은 금속시험연구소와 통합하여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로 재출범했다.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는 다시 1980년 선박연구소와 통합하여 한국기계연구소(현 한국기계연구원)로 거듭났다.

 세개 진흥기관 가운데 발족연도가 가장 오래된 국립공업연구소는 국내에서 유일했던 공산품 품질관리기구로서 진흥대상 업체들의 전자기술 개발과 품질검사 및 지도를 맡았다.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 2단계를 1년 앞둔 1971년 당시로서는 거금인 25만달러를 들여 전자기기 품질검사용 장비를 도입했고 이듬해에도 10만달러 상당의 장비를 추가 구입함으로써 국립 품질검사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췄다. 1883년 8월 조선조 궁내부 전환국(電換局) 소속의 분석시험소를 모태로 하고 있는 국립공업연구소는 해방 후 정부수립과 함께 상공부 산하기관이 됐다가 1973년 신설된 공업진흥청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명칭도 국립공업표준시험소로 변경됐다. 이후에도 몇번의 명칭 변경을 통해 현재의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으로 정착이 됐다.

 KIST는 진흥대상 업체들의 기술개발을 지도하고 FIC 업무 범위를 벗어나는 특수 분야의 품질관리, 기술훈련, 기술정보 제공 등을 담당했다. KIST는 1969년 11월 진흥기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공업화시험실 등을 신설하는가하면 이듬해에는 미국전기전자학회(IEEE)와 공동으로 「국제전기전자학술대회」를 주최, 안팎으로 큰 관심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1966년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설립된 KIST는 기계·전기·전자·금속·화학 등 전 산업을 아우르는 종합연구소로서 자세한 설립 배경 등은 지난호(6월 17일자)에서 설명한 바 있다.

 한편 전자공업진흥법은 이 시기에 비슷한 취지로 만들어져 시행됐던 기계·철강·조선·화학·섬유·에너지 등 다른 6개 분야 진흥법과 함께 1986년 7월 공업발전법(工業發展法)으로 흡수 통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