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23);제 2부 산업의 태동 (14)

외국자본과 기술의 유입

 1960년대 말까지 국내에서 생산되던 전기전자 품목은 대표적인 것만도 50여종이 넘었다. 이른바 국제분업에 의한 조립생산이 대종을 이루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그 종류에서만큼은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주요 품목들로 저항기·축전기·스피커·브라운관·커넥터·릴레이·페라이트코어·전지·영구자석·튜너·소형모터 등 전자부품 분야와 다이오드·트랜지스터·집적회로(IC)·전자관 등 반도체 분야 등이 눈에 띄고 있다.

 민생용 기기라고 불렀던 가전 분야에서는 AM·FM겸용 라디오와 흑백TV를 비롯하여 냉장고·선풍기·전축·전화기·녹음기·카오디오·적산전력계 등이 이미 자체 브랜드로 출하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일부는 수출시장에 선을 뵈기도 했다. 산업용 기기 분야에서는 자동교환기와 케이블을 필두로 무선송수신장치·어군탐지기·레이더·오실로스코프 등이 국내 수요를 충당하고 있었다.

 생산성과 부가가치를 따져보는 국산화율에서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된 1966년 말 평균 37%이던 것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된 1971년 말에는 40%대에 근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우리나라 전자공업현황)

 생산품목이 다양해지고 국산화가 진전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미국과 일본계를 위시한 다국적기업의 직·간접 투자와 선진 기술도입 등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외자도입법 제정 이후 급증한 다국적기업은 기대반 우려반 속에 초창기 산업발전과 영토 확장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

 외자도입법은 1966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을 앞두고 정부가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외자도입촉진법」 「차관의 지불보증에 관한 법률」 등을 통폐합하여 새로 만든 것이었다. 1957년 자유당 정권 때 제정된 외자도입촉진법이 차관도입에 초점을 두었다면 외자도입법은 원리금 상환부담이 적은 다국적기업의 직·간접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골자였다. 차관은 쉽게 빌릴 수 있었던 반면 원리금에 대한 금융부담이 높다는 단점이 있었고, 기업투자 유치는 어려웠지만 금융부담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1969년 말까지 한국에 설립된 다국적기업은 100% 단독투자 형태가 10개사, 국내 자본과의 합작이 12개사 등 모두 22개사였다. 이 가운데 단독투자 1개사와 합작투자 2개사만이 외자도입법 시행 이전에 출범한 것이었다.

 100% 단독 출자기업은 1966년 4월 실리콘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등을 위해 설립된 페어차일드가 1호를 기록했다. 그러나 외자도입법을 적용받은 최초의 기업은 집적회로와 다이오드 제조 전문인 시그네틱스(1966년 7월)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모토롤러(1967년 3월)를 비롯, IBM(1967년 4월)과 컨트롤데이터(1967년 6월) 등 컴퓨터 및 관련부품 회사들이 상륙했고 TV튜너·릴레이·마그네틱헤드 등 전자부품 분야에서 오크일렉트로닉스(1968년 1월)·AMC(1968년 2월)·코미(1968년 7월) 등이 가세했다. 1960년대 진출한 100% 단독출자 기업들은 모두 미국계였다.

 국내 자본과 합작해서 설립된 기업들로는 가전 분야에서 중앙상역(1965년 9월, 로열팩)과 남성흥업(1969년 11월, 크라운), 전자부품 및 반도체생산 분야에서 고미산업(1965년 12월, 코미)·한국마이크로전자(1966년 12월, USKM)·한국도시바(1969년 7월, 도시바)·삼성산요전기(1969년 9월, 산요전기)·삼성NEC(1969년 12월, NEC) 등이 눈에 띄고 있다. 유리관을 생산하던 세방전자(1967년 8월, 시그네틱스)도 이 때 출범했다. (괄호안은 외국 투자회사)

 외국기업과 국내 기업의 합작비율은 정부가 아직 외국자본의 비율을 규제하지 않던 때라서 25 대 75에서 반대로 80 대 20까지 다양했다. 합작기업은 미국계가 7개사, 일본계가 5개사였다. 외국기업의 진출은 한마디로 이들과 한국정부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우선 외국기업들에 한국은 저렴한 임금의 고급 노동력을 풍부하게 보유한 나라였다. 때마침 외국기업들은 앞서 진출해 있던 홍콩과 대만 등의 현지 노동자들로부터 줄기찬 임금상승 압력을 받고 있었고 현지국가의 정세 불안까지 겹쳐 생산시설의 이전 또는 분산을 심각하게 고려하던 상황이었다.

 1967년을 기준으로 볼 때 대만과 한국의 임금 수준을 보면 기술직 사원의 경우 대만이 월 65∼90달러였던데 반해 한국인 기술직은 월 45∼60달러였을 만큼 차이가 있었다. 여기에 전자산업의 강력한 육성의지를 내외에 천명하고 있던 한국정부는 여러 가지 세제혜택과 행정절차의 간소화 그리고 노동관련법의 제한적용조치(1970년대 이후) 등을 내세워 이들을 유혹했다. 1967년 정부는 외자도입법에 의해 설립인가를 받은 기업들에 대해서는 수출입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 주겠다는 특별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투자규모(자본금)는 모토롤러가 단독 출자한 모토롤러 한국법인이 754만여달러, 삼성물산과 일본의 산요전기가 합작한 삼성산요전기가 600만달러, 역시 삼성물산과 일본전기(NEC)가 합작한 삼성NEC가 300만달러 등으로 상위그룹을 형성했다. 1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한 곳으로는 페어차일드(215만달러)·시그네틱스코리아(168만달러)·한국도시바(140만달러) 등이었고 한국IBM은 초기에 95만달러를 투자했다가 1969년에 그 4배인 380만달러로 증자하기도 했다.

 다국적기업의 생산품목을 보면 단독투자와 합작투자를 불문하고 미국계는 집적회로·트랜지스터 등 반도체와 컴퓨터 분야가 주축이었고 일본계는 저항기·축전기(콘덴서)·트랜스포머·스피커 등 전자부품 분야가 대종을 이뤘다. 또 1970년대에 나타난 현상이지만 미국계는 서울 등 수도권 일원을, 일본계는 1970년에 문을 연 마산수출자유지역을 각각 생산거점 또는 활동근거지로 삼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다국적기업 가운데 초기 투자규모가 가장 컸던 모토롤러 한국법인의 경우 미국본사 최고책임자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투자의향서를 전달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 회사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1967년 3월21일 투자인가를 받고 5월부터 공장신축에 나서 이듬해 1월 준공을 보았을 만큼 현지법인 설립작업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모토롤러 한국법인이 정부에 제출한 1968년도 반도체 생산계획을 보면 집적회로 3920만개, 트랜지스터 7000만개 등 대규모였다. 한국인 직원 채용도 상반기 800명, 하반기 500명 등 1300명이나 됐다.

 그러나 1960년대 설립된 다국적기업들이 모두 한국정부와 일반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것만은 아니었다. 1968년 1월 현지법인을 출범시켰던 오크일렉트로닉스가 진출 1년 만에 철수해버린 사건은 다국적기업들의 행로가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는 사실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오크측은 외자도입심의위원회로부터 229만달러 투자를 조건으로 현지법인 설립인가를 받아놓고도 실제로는 50만달러의 자본재만 들여왔고, 1968년 한해 동안 TV튜너 생산량도 당초 약속했던 20만개의 8분의 1인 2만5000개에 그쳤다. 오크가 한국정부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미국본사가 한국법인 설립을 전후한 시점에 적자가 누적됐고 미국내 시장경쟁력이 약화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오크측은 현지법인의 폐업과 자본철수의 이유를 한국인 노동자들의 과대한 임금인상 요구, 통관절차의 복잡성, 생산공장의 입지조건 불리 등을 주장했다. 오크일렉트로닉스의 철수는 당시 한국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여러 다국적기업들을 주춤거리게 하는 요인이 됐음은 물론이다.

 한편 국내 기업들이 1960년대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기술들은 대개 라디오·TV·냉장고·자동교환기·케이블 등 원천 기술이 없어도 쉽게 조립생산이 가능하던 분야에 집중돼 있었다. 한국의 전자산업 자체가 불모지에서 탄생된 것이라서 제품개발은 물론이거니와 생산기술 모두를 외국업체들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국내 기업들에 외국의 선진 기술은 기업 확장과 기업경쟁력 제고를 꾀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기도 했다.

 기업별로 보면 금성사가 히타치(라디오·TV·냉장고), 지멘스(EMD식 자동교환기), 해케탈·고가전기(케이블) 등으로부터 가장 많은 기술을 들여왔다. 금성사는 특히 주력 품목의 생산 거의 모두를 외국 기술에 의존하는 양태를 보였다. 동양정밀의 경우는 NEC(스트로저식 자동교환기)·다무라전기(공중전화기)·고덴제작소(어군탐지기) 등 주로 일본 기술을 들여와 산업전자기기 분야에서 굳건한 위치를 지켜 나갔다.

 품목별로는 라디오·TV가 가장 많았는데 금성사(히타치) 외에 한국마벨(RCA)·대한전선(도시바)·동남전기(샤프)·삼양전기(마쓰시타)·천우사(필립스)·동신화학(RCA) 등이 조립기술과 자재 일부를 들여와 수출 또는 내수용 완제품의 생산을 시도했다. 이밖에 오리온전기가 도시바의 흑백브라운관 기술을, 한국통신기공업이 후지통신의 방송장비 제조기술을, 삼화전기가 일본콘덴서공업의 축전기 기술을 각각 들여왔다.

 기술도입 조건은 계약 당시의 경상비 외에도 판매액의 2∼3% 또는 세트당 3∼5달러 등의 로열티를 지급하는 방식이 통용됐는데 대부분은 국내 기업들에 매우 불리한 것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