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두환 네오웨이브 사장
국내 통신시스템 기술은 국제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전전자교환기를 개발한 몇 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며,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시스템 분야도 선두에 있다. 그리고 국내 전송 장치 및 네트워킹 장치 모두 수준급에 도달해 있다.
하지만 우리 통신시스템 분야의 위상은 기술 수준에 비해 자못 뒤떨어진다. 해외 시장에서 통신시스템이 가전이나 단말기에 비해 그 기술 수준의 차이보다 더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통신시스템은 글자 그대로 시스템 분야여서 단품인 위의 비교대상보다는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와 기술 수준이 비슷한 이탈리아·이스라엘 그리고 후발국가인 대만보다도 시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시스템 분야라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통신시스템 분야는 70년대 말 KD4 Channel Bank와 80년대 초 TDX 전전자교환기의 독자개발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통신시스템 분야가 기술이 낙후된 후발 산업이란 점을 감안,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펼쳤다. 초기 보호정책은 수입규제였으며 점차 수입규제를 이용한 보호가 어려워지자 사양(Specification)을 이용한 보호정책을 전개했다.
사양을 이용한 보호정책은 국내 기술이 있는 경우 특이 기본사양을 넣어 외국 제품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기술이 없는 경우 일반 사양으로 하여 외국 제품도 들어오게 했다. 이런 보호정책은 국내 시장 보호에 효율적이었으며 선별적으로 분야에 따라 보호정책을 펼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 덕분에 국내 업체들은 정부의 우산아래 돈을 벌고 이를 재투자해 국제 수준의 기술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에 입맛 들여진 국내 기업들이 이 보호정책을 상당한 기술 수준에 도달한 뒤에도 계속 요구하면서 국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분야까지 그 경쟁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됐다. 즉 국내 기업들은 일단 어려운 경쟁 상대인 외국 기업들을 만나면 사양으로 따돌린 채 국제 경쟁이 없는 자기들끼리만 잔치를 벌인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때로는 사양을 통한 보호가 사양의 왜곡을 낳기도 했다. 우리의 기술 수준이 상당히 올라 있는 경우에는 그 명분을 찾기 위해 표준에 이르지도 못한 새로운 기술을 사양에 집어넣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기술적으로 성숙되지도 않았고 또 그 구현에 비용이 많이 들어 국내 통신시스템 가격을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만들기도 했으며 국제 시장에서는 원가상승으로 경쟁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특이 사양들이 때로는 보호를 위해, 때로는 국내 개발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이용됐던 것이다.
물론 사양을 통한 보호가 통신기술 개발 초기에 국내 통신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양을 통한 보호가 기여라기보다는 경쟁력 상실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다.
따라서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해 국내 통신시스템의 사양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최소한의 필요 사양」으로 해야 하며, 추가 기능들은 옵션으로 규정해야 한다. 현재는 추가 기능들이 옵션이 아닌 기본사양으로 돼 있어 그것이 세계 시장에서 별로 소용이 없더라도 개발해야 하고 또 시스템에 추가해야 하므로 개발 및 생산비용이 올라가 경쟁력을 잃게 된다. 이런 추가 사양들을 제외해야만 국내에서 개발한 통신시스템을 국제 시장에 그대로 내다 팔 수 있고, 시장 확대에 따른 양산이 가능해져 수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다음으로는 사양을 작성한 뒤 개발을 진행할 때 중간에 이런 저런 기능을 추가하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 세계적인 통신업체인 루슨트나 노던텔레컴 등에서 절대 배격하는, 이런 개발 도중에 추가되는 기능은 초기 사양에 기초한 시스템의 골격에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개발 시스템을 기형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 예로 처음에 저가격 필수기능만 외치며 내걸었던 사양에 이것 저것이 추가되고 이에 따라 초기 시스템 골격에 맞지 않는 기능을 억지로 추가하다 보면 나중에는 포니에 그랜저의 엔진을 다는 식의 기형적인 형태가 되고 만다. 이런 기형이 국제 경쟁력을 갖출리는 만무하고, 따라서 값비싼 비효율적 국내용으로만 전락하게 된다.
또 사양 작성에 국내만의 특이한 사양은 없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그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특이 사양으로 국내의 통신시스템 개발 및 생산비용을 올릴 필요가 없으며, 그런 부가적으로 달린 혹이 국제 경쟁에서는 당연히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런 특이 사양은 사양 작성자들이 악용하게 되면 시장 기능의 왜곡을 가져와 단순히 국제 경쟁력 상실 이외에도 국내 시장에 어떤 특별한 회사나 장치가 경제성 및 기술성과는 별도로 시장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국내 통신시스템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된다.
이렇게 「최소한의 필요 사양」으로 무장된 국내 통신시스템은 그것에 각사가 부가가치를 옵션으로 추가해 기술경쟁력을 높일 수 있고, 국내에 사용되는 제품을 해외에도 그대로 팔 수 있어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과거 단순히 국내 개발의 성과를 해외 시장 개척의 발판으로 삼던 것에서 벗어나 기술 및 가격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춘 통신시스템을 가지고 앞으로 확대가 예상되는 국제 통신시스템 시장에 우리의 경쟁국들보다 유리하게 진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