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마지막 광복절을 맞아 남과 북의 민간 학자들이 의미있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남과 북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용어사전을 발간한 것이다.
「국제표준정보기술용어사전」으로 이름붙인 이 사전은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제정한 정보기술분야의 표준용어인 ISO 2382의 남북공동 번역본이다. ISO 2382의 분류번호 1번부터 25번까지의 용어에 해당하는 우리말 용어와 해설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용어에서 합의를 도출, 남과 북이 공동으로 사용할 우리말 용어가 만들어졌지만 남과 북이 규정하고 있는 맞춤법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남과 북의 용어를 구분해 함께 싣고 있다.
예를 들어 두음법칙 적용상의 차이로 남측의 「논리함수」, 북측의 「론리함수」가 함께 실렸고 외래어 표기법의 차이로 인해 「컴퓨터」와 「콤퓨터」가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맞춤법의 차이로 인한 표기상의 차이일 뿐 사실상 같은 용어라 할 수 있다.
이 사전은 6년여의 민간 학술교류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94년 8월 남북의 국어학자와 정보기술자, 그리고 중국 조선족을 포함한 미국·독일 등지의 해외동포 학자들이 중국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에 모여 범민족 학술대회를 가졌다.
「제1회 우리말컴퓨터처리국제학술대회(ICCKL)」가 바로 그것이다.
남측의 국어정보학회, 북측의 조선콤퓨터쎈터, 중국의 조선어정보학회가 주축이 된 이 학술대회는 민족동질성 확인을 위해 가장 비정치적이면서도 시급한 주제로 한글을 선택했고 미래 민족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한글의 정보처리 기술분야를 핵심과제로 선정했다.
이후 96년까지 매년 학술대회를 진행했고 3차 회의가 벌어졌던 96년에는 컴퓨터처리를 위한 한글자모 순서, 컴퓨터 자판기의 배열순서 등 남북이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던 문제의 통일안에 합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황장엽 망명사건 등으로 인해 97년부터 북한측이 불참하면서 ICCKL은 계속되지 못했다.
이번 통일 용어사전은 올 2월 국어정보학회와 중국 조선어정보학회간에 우선 합의하고 다시 중국 조선어정보학회가 북의 조선콤퓨터쎈터 등의 전문가들과 협의를 거쳐 제작에 들어갔으며 지난 15일 광복절을 기념해 치러진 「제4회 ICCKL」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게 된 것이다.
분단의 장기화로 남북간 언어의 이질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보기술분야에서만큼은 용어의 통일을 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성과물로 평가된다.
이제 이 통일사전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를 포함, 기타 학계의 광범위한 여론 수렴과정을 거쳐 현실적인 사용가치를 인정받는 일이 남았다.
이번에 발간된 통일사전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자모순서와 다소 차이가 있으며 또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용어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향후 지속적인 논의와 협의를 통해 점진적인 개선안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용어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보다 그 용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따라서 남이나 북이나 이 사전을 관련분야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이 사전은 민간 차원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강제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향후 남북간 교류에서 정보기술 용어사용시 적어도 이번 통일용어를 병행표기하는 방법 등을 통해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김상범기자 sb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