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라는 긴 터널을 벗어난 통신부품시장은 또 한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성장은 IMF라는 시련을 극복한 「준비된 성장」으로 90년대 중반의 거품성장과는 사뭇 다를 것으로 보인다.
우선 기업의 사업내용이 건실해졌다. IMF로 기업마다 「한계사업」을 정리했으며 불필요한 인력감원 등으로 거품을 완전히 제거했다.
또 많은 기업들이 백화점식 사업에서 벗어나 전문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기업들도 기술 및 수출중심으로 체질을 개선했다.
또한 외국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나 외국 현지 연구소 설립, 외국 전문 엔지니어 영입 등 성장에 대비한 내실다지기 작업에 주력해 온 것도 최근 통신부품업계의 한 모습이다.
정부도 통신부품산업의 중요성을 인식, 국산화 중장기 계획을 마련하는 등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국가적 전략산업으로의 육성 의지를 밝히고 있기도 하다. 전자산업진흥회의 한 관계자는 『국내 통신부품산업의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정도로 성장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면서 『그렇지만 기술수준 면에서는 아직 미국과 일본보다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정부와 연구계·학계·산업계가 하나로 중지를 모아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국내 통신부품시장은 연간 3조원 규모로 향후 전자부품시장을 이끌어갈 주도산업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여 벌써부터 업체간의 치열한 시장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최근 일고 있는 정보통신 열풍이 국내 부품업계의 산업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폭발력을 지니고 있어 통신용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면 2000년대에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삼성전기와 LG정밀 등은 대기업 나름대로, 대덕전자와 한국전자·삼화전자·한국단자공업 등 중견 부품업체들은 그들대로 통신부품을 2000년대 주력사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사업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으며 중소 일반 부품업체들도 이 부문에 새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 품목선정에 나서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자금력을 지닌 대기업들은 디스플레이 등 시장규모가 큰 생산품목 위주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반면 중소 부품업체들의 경우 현재 생산품목을 응용해 통신용 시장을 두드리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삼성전기와 LG정밀 등 종합부품 업체들은 향후 10년 내에 통신부문의 매출을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으로 끌어올려 통신부품을 2000년대 주력사업화한다는 목표 아래 이미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부품 전문업체들의 움직임 또한 이에 못지않다. 대덕전자·코리아써키트·청주전자·이수전자 등 PCB 업체들은 이동전화 기지국용 다층회로기판(MLB) 등 통신용 PCB 생산비중을 대폭 높이고 있으며 써니전자·고니정밀·국제전열공업 등 수정디바이스부품업체들도 통신제품의 소형화 추세에 따라 세라믹계열 제품을 주력사업화하고 있다. 우영과 골든콘넥터산업 등 커넥터도 통신용으로 전문화하거나 이 분야를 집중 사업분야로 선정, 회사의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으며 특히 협피치 제품개발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모터의 경우도 삼홍사와 대성전기 등이 이동통신 단말기용을 중심으로 통신용 수요에 대응하고 있으며 단암산업과 태형산전·동한전자 등 SMPS 업체들도 국·사설 교환기용 DC/DC컨버터 등 통신시스템용 제품이나 충전기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
또 안테나의 경우 에이스테크놀로지와 하이게인안테나 등 기존 업체들과 케이세라와 미래테크 등 신규업체간의 듀얼밴드형 안테나 개발경쟁이 뜨겁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통신부품산업 중에서 가장 활발한 시장진입을 보이고 있는 분야는 고주파(RF)와 전지, 디스플레이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분야는 업체간의 시장선점 경쟁이 다른 사업에 비해 더 치열해 그만큼 제품의 국산화 열기도 달아오르고 있다.
전지는 이동통신단말기의 구동원으로 향후 높은 수요증가가 예상돼 각광받고 있으며 디스플레이분야 역시 삼성과 LG 등 4대그룹이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사활을 건 경쟁을 펼치고 있는 상태다.
RF분야는 KMW와 한원·마이크로통신 등 전문업체 중심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RF분야에서 가장 관심을 끌고 있는 갈륨비소 고주파단일집적회로(MMIC)는 그동안 군사용으로 사용돼 왔으나 고주파 특성이 우수하고 집적도가 높아 제품의 소형화 및 저가화에 유리하다는 점에서 통신용 부품시장의 총아로 등장하고 있다. 유전체 세라믹 필터나 전압제어발진기(VCO), 수정발진기(OCXO) 등 고주파 모듈사업에도 많은 전문업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통신부품 산업은 이제 막 태동기에 진입한 상태다. 반면 일본 등 선진국은 성장기에 접어들고 있어 우리의 통신부품산업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 무엇보다 선진국과의 기술적 격차를 극복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 숭실대 정보통신공학과 양승인 교수는 『통신용 반도체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통신부품 선진국인 일본과의 기술 격차가 5년 이상 벌어져 있다』면서 『이 정도 기간은 산업시장에서 굉장한 기술격차를 보이는 것이다』고 말했다.
국내 통신부품산업은 제조업의 기반없이 수요자 중심으로 성장해 오면서 대부분 도입기술에 의존, 핵심부품은 대부분 수입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통신부품산업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전자부품연구원(KETI) 등 국책연구소를 중심으로 핵심부품 개발이 활기를 띠면서 주요 부품들이 속속 국산화되고 있다.
통신부품의 국산화 열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지만 아직 업체층이 선진국에 비해 얇고 핵심기술은 거의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부품국산화를 실현하는 데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국전력연구원의 조현준 박사는 『통신부품산업은 세계 통신기술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산·학·연 형태로 집중적인 연구개발이 필요하며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워낙 짧아 대기업보다는 전문기업에 적합하다』면서 『전문기업들은 분야별 전략적 제품개발과 공동 마케팅 등을 통해 효율적으로 시장공략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업체의 영세성도 극복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IMF이후 국내 경기가 침체되면서 많은 통신부품 전문업체들은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어렵게 제품개발을 해놓고도 양산에 필요한 자금확보가 안돼 신제품을 그대로 묶어 두고 있는 실정이다.
한원의 장형식 사장은 『주문은 계속 들어오는데 자금이 부족해 원자재를 수입하는데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다』면서 『주변에 벤처자금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 자금을 활용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정부는 90년대 중반부터 통신부품산업의 중요성을 인식, 최근 집중적인 육성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산업자원부는 현재 30%에 머물고 있는 첨단 통신기기 부품 국산화율을 오는 2004년까지 60%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하고 내년부터 핵심부품 개발을 집중 지원하기로 했다.
산자부는 이를 위해 현재 KETI가 성장가능성이 높은 10개 제품군을 중심으로 국산화 실태, 개발대상 부품, 추진방법 등에 대한 연구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10월말 이 연구결과가 나오는 대로 올해 말까지 「정보통신부품개발계획」을 수립, 내년부터 본격 연구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정보통신부도 지난해 통신용 핵심부품 육성계획을 발표, 이동 및 위성 통신용 변복조기 등 7개 분야의 총 21개 품목을 제시했다. 정통부는 이동 및 위성 통신 변복조기, 표면탄성파(SAW) 디바이스를 이용한 마이크로파 신호처리부품, 주파수합성기 및 VCO, RF MMIC, 이동 및 위성 통신용 능동안테나, 듀플렉서 및 유전체 필터, 산화물 신소재 박막을 이용한 마이크로파 및 밀리미터파용 고온 초전도 소자 등 7개 품목을 선정했다.
정통부는 이들 21개 통신용 핵심부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RF분야에 481억원, 반도체분야에 190억원 등 3년간 총 1071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통신부품 육성정책에 대한 부처간의 주도권 다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어 자칫 혼선을 빚을까 우려되고 있다.
이동통신용 세라믹 부품의 경우를 보더라도 과학기술부에서는 고주파용 칩 인덕터와 고유전율 이동통신용 소재 및 부품, 위성통신용 부품의 후막칩화 및 경량화 등을 지원하고 있고 산업자원부는 GPS용 유전체 세라믹 안테나와 칩 세라믹 필터 등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
또 정보통신부는 세라믹 필터와 아이솔레이터 등을 지원하는 등 부처간의 중복지원과 정책혼선 등이 발생하고 있다.
IMF한파라는 시련을 딛고 또 한차례 도약을 꿈꾸고 있는 통신부품산업은 기술 및 가격이라는 시장을 놓고 업체간의 힘겨루기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양봉영기자 byy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