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통화는 제각기 유래를 갖고 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의 화폐는 더욱 그렇다. 네덜란드의 「길더」는 1325년 처음 등장해 무려 7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 「프랑」은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었고 독일 「마르크」, 스페인 「페세타」, 이탈리아 「리라」 등은 19세기에 태어났다. 그 나라 역사만큼이나 국민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화폐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화폐를 두고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국기』라고 평하기도 한다.
역사가 깊은 유럽 국가의 화폐제도가 올해부터 단일화됐다. 이념이 통화의 명칭으로 등장한 것이다.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화」가 바로 그것. 「유로」라는 명칭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목표를 상징하는 것이다. 유럽은 국가간 패권 다툼에 따라 두번이나 세계대전을 겪은 곳이다. 세번째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국가 본연의 모습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상이 유럽에 널리 퍼져 오늘의 화폐통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로는 매우 흥미롭다.
2002년 6월 이후 유로화 지역에서는 각 나라의 화폐를 더 이상 쓸 수 없도록 일정이 짜여 있다. 지금까지 사용해온 마르크·프랑·리라 등은 엄밀하게 말해 2002년 6월까지 잠정기간 사용하는 병용 화폐로 전락, 서서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유로화 를 도입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유럽 전역에 걸쳐 동일 상품의 가격차이를 없애 단일시장을 구축하고 역내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로화 출범 7개월이 지났지만 이같은 취지와는 달리 같은 브랜드의 제품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국내 업체가 유럽에 수출하고 있는 전자레인지의 경우 이 제품의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프랑스에서는 동일 규격의 일본산 제품보다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으나 그렇지 못한 독일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각국의 세율·운송비·무역구조 등 여러 요인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브랜드 파워가 판매가격 차이를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품 시장에선 이념보다 브랜드 파워가 더 빛을 발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