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공단의 출범
「호프만의 법칙」에 따르면 한 나라의 공업화 과정에서 제1단계는 경공업과 중공업의 구성비가 약 5 대 1, 2단계에 이르러서는 2.5 대 1로 그리고 3단계에서는 1 대 1로 정형화된다고 한다. 이 법칙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업화는 1960년대 초반의 전단계를 거쳐 1966년경 제1단계에 들어섰고 10년 뒤인 1970대 초반 제2단계 그리고 1970년 후반 제3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공업화 발전단계를 호프만의 법칙대로 이끌어준 실천적 정부정책 가운데 하나가 대규모 중공업단지의 조성이다. 공단의 조성은 1964년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 제정을 계기로 서울 구로동에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착공되면서 본격화했다.
1970년대 들어 공업단지조성정책은 산업기지개발촉진법(1973년) 제정을 계기로 전국으로 확대 실시됐다. 이때 공단조성정책은 크게 정부(상공부) 직할공업단지, 수출자유지역, 지방공업단지, 민간공업단지 등 4개 유형으로 나눠 진행됐다. 직할공단으로는 수도권의 영등포·구로·시흥·부천·부평·주안을 잇는 한국수출산업1∼6공단, 온산(울산)공단, 창원공단, 반월공단 그리고 구미공단 등이 있었다. 수출자유지역으로는 마산과 이리(익산)에 각각 설치됐다. 직할공단은 기계·종합화학·전자 등 중공업 분야를 집중 육성하기 위해, 또 수출자유지역은 외국기업 유치를 위해 각각 설치됐다. 지방공단으로는 광주·대구·전주·춘천 등 각 시도마다 1∼2곳씩 조성됐다.
주요 공단 가운데 정부의 전자산업 육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곳은 1970년을 전후에서 조성계획이 확정된 구미전자공업단지와 마산수출자유지역이다. 두 공단의 착공은 대규모 공단으로서는 한국수출산업공단과 1968년 울산 대단위 석유화학단지에 이어 각각 세번째와 네번째였다.
1969년 7월 한국도시바의 입주로 문을 연 구미공단은 기본적으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에 따른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1969년 1월에 제정된 전자공업진흥법과 그 실천 목표라 할 수 있는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에 따라 조성된 것이었다. 전자공업진흥법의 경우 제11조 ①항에 『상공부 장관은 전자기기 등의 수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고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에서는 1971년 1억달러, 1976년 4억달러의 전자기기 수출목표를 세워놓고 있었다. 상공부측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용공단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1969년 12월 구미공단은 당시 경북 선산군(善山郡) 구미읍(龜尾邑) 남동쪽 낙동강 일대 120만평에 터를 잡고 단지 착공에 들어갔다. 제1단지(전자·섬유)와 제2단지(반도체)가 완공된 1980년까지 입주업체는 전자 분야 97개사, 섬유 분야 91개사, 기타 17개사 등 도합 205개사에 이르러 내륙공업단지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이어 1980년 이후 또 다시 인접한 경북 칠곡군 등의 부지 250만평을 추가 매입하여 제3단지를 조성했다.
구미공단은 1980년대 수출 100억달러 달성과 전자산업이 수출 1위 업종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2단지가 완공된 1980년 말까지 입주업체들의 업종 분포를 볼 때 섬유 분야가 45%에 이르고 있지만 정부나 일반인들의 시각은 아직까지도 구미공단을 국내 최대 규모의 전자전문공단으로 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같은 배경에는 단지조성 당시,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계획이 구미공단에 그대로 함축돼 있다고 보는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인 구미에 대규모 전자공단이 들어서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구미공단의 조성이 처음 거론된 것은 수도권에 이어 울산·춘천·청주 등 지방도시에 잇따라 공단이 들어선 것이 계기가 됐다. 전국적으로 해당 지역출신 상공인들과 유지들이 자기 고장에 공단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대통령을 배출한 구미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구미공단 유치에 가장 앞장선 사람들로는 유지였던 장월상(張月相, 작고), 이 고장 출신 재일교포 실업가 곽태석(郭泰石, 전 한국전자 회장, 작고) 그리고 이원만(李源萬, 전 코오롱그룹 회장·국회의원, 작고)과 서갑호(徐甲虎, 전 방림방적 회장, 작고) 등 기업인 그리고 당시 경북도지사였던 양택식(梁鐸植, 전 서울시장) 등이 꼽힌다.
경북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지주였던 장월상은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선생 가문으로서 당시 구미농지개량조합장을 맡고 있었고 박 대통령과는 유년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때마침 장월상은 양택식 지사가 도내 월성군(月城郡) 안강면(安康面)지역에 공업단지를 유치하려는 계획을 미리 알고 이를 구미지역으로 돌려놓기로 마음먹는다. 이어서 그는 구미읍사무소에 선산군수 박창규(朴昌圭)를 포함한 지역유지 50명을 규합하여 공단설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양택식과 담판을 지었다. 이 담판에서 장월상은 양택식에게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말이 있듯이 고향이 발전하겠다는 데 각하인들 싫어하겠는가』라며 몰아붙였고 양택식은 결국 공단부지 120만평을 평당 220원에 매입한다는 조건을 달고 안강면 유치계획을 구미지역으로 바꿨다고 한다.
한국도시바 사장 곽태석은 구미공단 단지조성에 앞서 1969년 7월 반도체공장을 착공함으로써 장월상의 밀어붙이기식 공단유치작전을 지원했다. 한국도시바(1974년 현재의 한국전자로 개명)는 박 대통령의 주선으로 곽태석과 일본도시바가 3 대 7의 합작비율로 설립된 한·일합작 트랜지스터 생산회사. 한국도시바는 구미공단 입주 1호였을 뿐만 아니라 구미공단이 전자전문공단으로 조성되는 기폭제 역할까지 했다.
이원만의 경우는 구미가 폴리에스테르 섬유 생산의 적지라 여기고 1996년 3월 한국폴리에스텔(1972년 코오롱에 업무통합)을 설립했다. 한국폴리에스텔은 구미공단 입주기업 중 섬유업종 1호로 기록돼 있다. 역시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방림방적 사장이던 서갑호도 구미공단 조성시기에 맞춰 동양 최대 규모의 방적공장인 윤성방적을 세우는 등 분위기를 돋웠다.(윤성방적은 1974년 공장 완공 후 시험가동중 화재로 전소됐다)
구미공단의 조성계획이 전자전문공단쪽으로 최종 결정이 난 것은 1970년 8월24일 제8차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였다. 이날 회의는 전자산업 수출증대를 위한 종합대책의 하나로서 구미공단을 전자산업 전문단지로 조성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또 한국정밀기기센터(FIC)를 통해 공단조성과 건설을 수행할 법인(관리공단)의 설립을 지시했다. FIC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등과 함께 전자공업진흥법에 의해 전자공업진흥기관으로 지정된 공익기관.
FIC는 곧바로 소장 박승엽(朴勝燁, 한영전자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상공부 공업제2국장(문병하)·중소기업국장(이광덕)·상역국장(정문길)·공업진흥관(유각종),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이관영),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관(이선기) 등 관련 중앙부처 관리들과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 이사장(곽태석),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이사장(박승찬), 대한전자공학회 회장(오현위), 구미공업단지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장월상) 등 단체 대표들을 포함하는 공단설립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설립준비위원회는 1971년 5월20일 상공부로부터 한국전자공업공단이라는 명칭의 법인설립허가서를 받았다. 초대 이사장은 준비위원장인 박승엽이 맡았다. 설립허가 과정에서는 법인의 명칭에 대해 장월상 등 일부 위원들이 정치적 효과를 노려 구미전자공업공단으로 할 것을 주장했는데 상공부가 원안대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한국전자공업공단은 1974년 장월상 등의 뜻대로 구미수출산업공단으로 개편된다.
구미공단의 유치활동이 한창일 때 박 대통령 역시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고향에 공업단지가 들어섰으면 하는 인간적인 소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원만의 회고록 「나의 정경50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고향에 공업단지가 들어선다는 것에 대해 저항감을 갖고 있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석에서 공단유치를 반대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원만은 박 대통령에게 『구미가 각하의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입지여건이 좋아서 공장을 짓는 것』이라며 『고향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않다』고 강변했다는 것이다.
한편 마산수출자유지역은 1968년 마산의 상공인들과 유지들이 모여 설립추진대회를 연 것을 계기로 정부는 1969년 9월 수출자유지역설치법의 제정과 함께 마산시 봉암동(鳳巖洞)과 양덕동(陽德洞) 일대 25만여평을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했다. 1970년 5월 착공에 들어간 마산수출자유지역은 1973년 완공을 보았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조성목표는 수출신장·외자유치·고용증대·기술향상 등 네가지였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목표인 수출신장의 경우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부품과 원자재는 가능한 한 국내에서 조달함으로써 부품의 간접수출효과까지 얻고자 했다. 외자유치 목표 역시 1980년까지 일본기업 69개사, 미국기업 3개사 독일기업 1개사를 비롯해서 한·일합작기업 18개사, 한·미합작기업 4개사 등 99개의 다국적기업이 입주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뒀다. 더욱이 이들 입주회사의 업종은 전자와 소재 분야가 전체 70% 이상이어서 마산수출자유지역은 사실상 외국 전자업체 전용공단이라 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