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업 5개년계획
1971년에 완료된 정부의 「제2차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의 추진결과 가운데 가장 큰 성과는 전화 가입자의 급증이었다. 1896년 궁내부에 제1호 전화가 설치된 이래 「제2차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직전인 1966년 말 우리나라 전화 가입자수는 27만7756명. 그런데 5년 후인 1971년 그 숫자가 56만3129명으로 늘어 100% 이상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단 5년 동안의 가입자수가 무려 70년 동안 누적된 가입자수를 앞선 것이다.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이 처음 입안된 것은 5·16 직후인 1961년 하반기였다. 같은해 12월30일에는 일제때 만들어 건국 이후에도 계속 유지돼 오던 「전신법」이 폐지되고 사상 처음 우리 손으로 만든 「전기통신법」이 제정 공포됐다. 전문 99조로 된 전기통신법의 특징은 공중전기통신사업의 공공성과 기업성을 강조하는 데 제정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었다.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은 전기통신법의 제정과 맞물려 통신시설의 전국적인 확대보급과 전신요금의 현실화를 비롯하여 통신기재공업의 육성 등을 최우선 목표로 입안됐다. 모두 147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1962년부터 1966년까지의 제1차 계획은 경험과 사업비 부족으로 여러 사업이 2차 시기로 이월되는 등 기대에 못미치는 실적을 거뒀다. 하지만 경제개발과 국민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통신시설의 확대보급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귀중한 성과를 거뒀다.
1967년부터 시작된 「제2차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은 기본 목표에서는 1차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통신시설을 지속적으로 확장함으로써 국가경제 규모의 확대와 산업활동의 증대 그리고 국제교류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차때와 달리 내실을 기하자는 데 역점을 둔 것만은 사실이었다. 사업비는 외환보유기금(KFX)·국제개발처(AID)·미국수출입은행·대일(對日)대미(對美)차관 등 외자 270억원(3500만달러)을 포함해서 총 680억원이 투입됐다. 1966년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이 5000억원 정도였으니 이 사업에 쏟아 붓던 정부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차 사업의 골격은 전무(電務)사업·우정(郵政)사업·전파관리 및 시험검정사업·과학기술진흥사업·일반관리사업 등 크게 5개 분야였지만 투입사업비 규모로 보면 전무사업이 92%로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전무사업으로는 장거리전화시설·전신시설·국제통신시설과 전무사업비의 70%가 투입된 대규모 가입자전화시설, 즉 전화기 교환시설의 확장사업 등이 있었다.
장거리전화시설사업의 경우 1971년 3월 서울과 부산간 교환원의 중계 없이 통화할 수 있는 DDD(Direct Distance Dialing)방식의 전화가 설치된 것이 가장 큰 사건이었다. DDD전화는 당초 1차 사업 시기인 1964년 독일 지멘스사의 기술을 들여와 이듬해 5월부터 운용할 계획이었으나 소요 회선의 절대 부족, 자재도입의 차질 등으로 6년 이상이 늦어진 것이었다. DDD의 개통으로 1970년까지 1700여회선에 불과하던 장거리전화가 1년 만에 6200여회선으로 급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시외전화 식별번호로서 첫자리에 「0」이 사용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국제통신시설사업으로는 1970년 6월 충남 금산(錦山)에 세워진 위성통신 지구국의 개국이 단연 으뜸이었다. 금산 지구국의 개통은 태평양지역의 미국 통신위성인 「인텔샛Ⅲ(INTELSAT Ⅲ)」에 접속하여 국제통신망을 위성통신회선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지구국의 건설과 운용에는 5년 동안 16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고 전국의 5개 후보지에 대한 실사작업에만 6개월여가 소요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기술적으로는 지구국과 지상 마이크로웨이브국의 주파수를 공용할 수 있는 조건, 스카이라인과 위성의 앙각(仰角) 사이에 적당한 클리어런스(Clearance)를 두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입지조건으로는 강풍 등 천재지변에 강해야 하며 공장시설과 항공기 소음 등 인공잡음으로부터 안전해야 하고 안테나 설치에 필요한 지내력(地耐力), 도로와 주거여건 등이 좋아야 했다. 운용측면에서도 상대국과의 데이터교환·회선조정·TV중계 등에 필요한 전문 기술지식과 영어회화 능력을 갖춘 기술직 직원의 확보도 적지않은 난제였던 것이다. 금산 지구국의 개통은 궁극적으로 미국·일본 중심이던 우리나라의 경제(무역)·문화 활동을 당시 건설붐이 일기 시작한 중동지역을 비롯, 유럽과 아프리카지역으로 다변화시켜 수출 한국 또는 세계 속의 한국을 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가입자전화시설의 중심인 교환기는 1971년 말 전체 64만여회선(전화 실가입자수는 56만여명) 가운데 자동식(自動式)이 72%, 공전식(共電式)이 8% 그리고 자석식(磁石式)이 20%의 점유율을 보이는 등 3개 방식이 혼용돼 있었다. 하지만 1970년 이후 자석식이나 공전식 교환기의 설치는 뚜렷한 하향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는 1960년대 후반부터 자동교환기 공급회사들이 대량 조립생산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물량 공급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자동교환기는 모두 전자회로가 아닌 스위치나 릴레이 부품을 채택한 기계식으로서 금성통신의 EMD(Edelmetall Motor Drehoaler)식과 동양정밀의 스트로저(Strowger)식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두 방식의 교환기가 국내 시장을 양분하게 된 배경은 1959년 자유당 정부 주도로 치렀던 국설교환기 국제입찰에서 독일 지멘스 할스케사의 EMD식이 낙찰되면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전화국용 국설(局設)시장은 EMD식, 기업 및 기관용의 중소규모 사설(私設, PABX)시장은 동양정밀이 조립생산하던 스트로저식으로 갈라졌다.
두 기종간의 시장경쟁은 금성사가 1963년 지멘스 할스케의 기술과 차관을 도입하여 EMD식 교환기를 국내에서 조립생산하면서부터이다. EMD식의 국내 생산을 계기로 정부는 1963년 국설교환기 설치기준에 관한 원칙을 다시 정했다. 우선 정부는 사설시장으로 제한돼 있던 스트로저식은 중심국(中心局) 이하 도시의 국설전화국과 동일 기종일 경우 그 이상 규모의 전화국에도 공급될 수 있도록 조건을 크게 완화했다. 반면 EMD식은 표준교환기로 선정된 1959년 이후 신규로 자동교환기를 설치하는 중심국 이상 도시에만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이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청와대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자산업 육성정책 수립에 관한 한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었던 김완희(金玩熙, 전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장) 박사는 최근 펴낸 자서전 「두 개의 해를 품에 안고」에서 1970년 봄 대통령으로부터 동양정밀 사장 박상선(朴尙善)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당시 김완희는 서울 동대문종합상가에서 열리고 있던 「제2회 한국전자전(KES)」을 직접 안내하던 중이었는데 박 대통령이 『김 박사, 박 사장이 통신계통, 군관계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도와주시오. 내가 군에 있을 때 신세를 많이 졌소』라고 했다는 것이다. 8·15 직후 육사교관 시절 박 대통령은 자신의 밑에 있던 사관후보생 박율선(朴律善, 전 동양정밀 회장)의 형 집에서 주말과 휴일을 보내곤 했는데 그 형이 바로 박상선이었다. 5·16 직후 대령으로 예편했던 박율선은 1966년부터 동양정밀의 부사장으로 있었다.
어쨌든 정부의 동양정밀 교환기 공급권 확대조치는 황금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자동교환기시장에서 EMD와 스트로저식 등 두 기종간 본격적인 경쟁체제를 유도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1965년부터 부산 온천동(溫泉洞) 공장에서 EMD식 자동교환기를 생산하던 금성사는 폭증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1968년 경기도 안양(安養)에 통신기기 전용공장의 신축에 나선 데 이어 1969년 10월 기존 통신사업부를 주축으로 한 금성통신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대표이사 회장에는 락희그룹회장 구인회(具仁會), 대표이사 사장에는 금성사 사장 구정회(具貞會)가 겸임했다. 수권자본금 2억4000만원은 전액 락희그룹에서 출자키로 했다.
금성통신은 금성사의 무리한 사업확장과 교환기 대량생산화의 지연으로 설립 초부터 자금난을 겪기 시작했다. 외국기술과 자본의 유치 필요성을 느낀 락희그룹은 안양 통신 공장의 본격 가동을 앞둔 1971년 7월 독일 지멘스와 당시 서독해외개발공사(DEG), 일본의 후지전기 등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때의 자본유치로 금성통신은 락희그룹(55%), 지멘스(25%), DEG(10%), 후지전기(10%)가 지분을 나눠 가진 다국적기업 금성통신전기주식회사로 탈바꿈하게 된다. 금성통신전기는 1974년 후지전기의 지분이 새로 출범한 금성계전으로 이전되면서 예전의 상호인 금성통신으로 돌아왔다. 기존 통신기기 전문생산업체인 동양정밀에 이어 금성통신의 가세는 1970년대를 주도한 기계식 자동교환기시장의 쌍두마차체제가 비로소 출범하는 것을 의미했다.
금성통신은 출범 전 모기업인 금성사에서 독립채산제 조직으로 운영되던 통신사업부가 그대로 독립한 첫번째 케이스로 꼽힌다. 이같은 계열사 분리방식은 이후 여러 대기업들에 채택되면서 널리 애용됐다. 이에 앞서 금성사는 1967년 방만했던 조직을 가전·통신·전선 등 3개 사업부 단위의 독립채산제 조직으로 개편했는데 전선사업부 역시 금성통신과 비슷한 시기에 금성전선주식회사로 분리시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