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27);제 3부 국산화와 수출의 시대 (3)

수출조합의 결성

 내수시장 선점에 주력하던 전자업계가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린 것은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고작 해외시찰단 파견에 머물던 업계의 움직임은 수출 관련단체의 결성, 해외 박람회의 참가, 세일즈맨의 파견 등 좀더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같은 움직임들은 기업의 영세성과 의욕만 앞세운 정부의 수출지상주의 정책 등으로 처음부터 적지않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최초의 움직임은 업체들의 수출입업무를 도맡아 할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1970년 8월 금성사·대한전선·삼성전자·동양정밀 등 내로라 하던 업계 대표들은 서울 뉴코리아호텔에 모여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 창립총회를 갖고 이날부터 봉래동(蓬萊洞) 우남빌딩 15층 한국정밀기기센터(FIC)의 서울 사무실 일부를 빌려 업무에 들어갔다. 이날 총회에서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은 『다각적인 수출전략을 일원화하여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는 한편 수출품목을 확대하고 적정한 가격을 추구함으로써…밖으로 한국 전자산업의 성가를 거양하고 안으로 국가적 지상과제인 수출증대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라는 내용의 발족 취지문을 공표했다.

 창립 당시 36개사가 가입한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의 초대 이사장은 곽태석(郭泰石, 싸니전기 사장)이 지명됐다. 이사진으로는 허준구(許準九, 금성사 사장)·설경동(薛卿東, 대한전선 사장)·김재명(金再明, 삼성산요전기 사장)·오동선(吳東善, 삼화콘덴서 사장)·윤봉수(尹鳳秀, 남성흥업 사장)·김용태(金容太, 한국마벨 사장)·김문주(金文周, 삼미기업 사장)·박청명(朴淸明, 동남전자공업 사장)·박승엽(朴勝燁, FIC 소장)·김인(金仁, 뉴코리아전자공업 사장)·문정광(文正光, 정풍물산 사장) 등이 각각 선임됐다.(괄호안은 당시 직함)

 수출조합의 발족은 우선 그동안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FIC가 나누어 관장하던 국산 전자제품의 수출관련 업무가 단일화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됐다. 나아가서는 한국의 전자산업계가 생산기반 지원을 전담하는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중장기계획·정보수집·인력양성 등을 전담하는 FIC와 함께 3두 지원체제를 확보하는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수출조합의 발족은 정부의 경제정책이 수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부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기업에 수출물량과 여신을 배정하는 제도를 도입해 성과를 보고 있었다. 수출조합은 정부(상공부)를 대신하여 업체들에 대한 수출추천권과 수출입 링크 외화확인권 등을 행사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이권이 아닐 수 없었다.

 조합 발족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이 1970년 4월22일 대한무역진흥공사 수출정보센터에서 주최한 상공부 장관 초청 조찬회가 계기가 됐다. 이날 연사로 참석한 이낙선(李洛善) 상공부 장관은 업체 대표들의 건의에 대해 『수출확대와 전자산업 발전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문기구가 필요하므로 협동조합내에 수출조합의 병설을 검토』하라며 즉석에서 화답했다.

 업계에서 수출조합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업계 대표가 1970년 3월 뉴욕 콜로세움(Colosseum) 전시장에서 열린 미국전기전자기술자협회전(IEEE Show)과 조찬회 열흘 전 도쿄 하루미(晴海)국제무역센터 전시장에서 열린 일본전자전(JES)을 잇따라 참관하는 자리에서였다. 두 전자전에는 FIC가 주관한 한국관이 설치됐는데 그 규모가 고작 1부스(3×3m)였던데다 전시품도 형식적인 견본품 몇개 정도였다. 업계는 이때까지도 해외 전자전의 참가가 수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창구가 없어 수수방관해 오던 터였다.

 논의 4개월 만에 발족한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은 그러나 1973년 2월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조직은 그대로 둔 채 단일 이사진 구성에 합의함으로써 사실상의 통합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두 조합간 업무의 중복과 마찰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이런 결과는 사실 수출조합이 발족될 당시부터 예견돼오던 것이기도 했다.

 우선, 두 조합의 조직은 처음부터 이사진의 구성만 달랐지 조합원은 모두 겹치는 소모적 구조를 탈피하지 못했다. 생산과 수출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 조합원사들로서도 두 개의 조합 운영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뒤늦게 발족된 수출조합으로서는 수출업무만을 관장할 수 없어 연관 업무를 함께 취급하게 됐는데 이것이 사사건건 협동조합과 부딪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협동조합 내부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2년 5월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일부 조합원사의 공금 유용과 부실채권 유발 등으로 설립 5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조합의 부실화는 일단 시장규모에 비해 업체수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이 그 이유로 지적됐다.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이 발표된 1969년 1월부터 1972년 5월까지 3년여 동안 모두 70개의 기업이 설립됐는데 이 숫자는 금성사가 발족된 1958년 이후 10년 동안 설립된 기업의 수와 맞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기업은 규모가 영세했고 협동조합의 원자재 공동구매사업은 물량 미달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조합을 통하게 돼 있던 정부지원 사업자금의 배정에 정실(情實)이 개입돼 있다는 투서가 상공부에 접수돼 협동조합 사무국이 전면 수사대상에 오른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협동조합은 사직 당국에 고발돼 3개월 이상 고유 업무가 마비됐고 사무국 상근 직원이 2명만 남고 모두 사직하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다. 전자업계를 대표하던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의 부실화는 연간 생산규모 830억원, 연간 수출 572억원에 불과하던 당시 전자업계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던가를 고스란히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두 조합이 합의한 단일 이사진의 이사장에는 협동조합측 이사장이던 박승찬(朴勝璨, 금성사 사장)이 선임됐고 새 이사진의 구성에는 기존 수출조합측 이사진 외에 신훈철(申勳澈, 삼성전자 사장)·박상선(朴尙善, 동양정밀 사장)·조중건(趙重建, 한진전자 사장)·구달서(具達書, 금성알프스전자 사장)·김향수(金向洙, 아남전자 사장)·이근배(李根培, 오리온전기 사장) 등 협동조합측 이사진이 가세함으로써 마무리됐다.(괄호안은 당시 직함)

 단일 이사진이 구성된 직후 수출조합이 치러낸 가장 큰 사업은 1973년 6월 시카고 매코믹 플레이스(McCormick Place) 전시장에서 열린 미국전자전(CES)의 참가였다. 수출조합은 이 전시회에 FIC 등의 협조를 얻어 아시아지역에서는 일본관 다음으로 큰 12부스(36×36m) 규모의 한국관을 확보하고 금성사·한국마벨·대한전선·호남전기·동남전기 등 15개사의 출품을 성사시켰다. 국산 AM·FM라디오와 흑백TV수상기 등 완제품과 가변저항기 등 전자부품이 미국 언론에 오르내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CES 출품과 때를 맞춰 최초의 민관합동 전자산업투자유치단을 미국 현지에 파견한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사건이었다. 상공부 기계공업국장을 단장으로 아남산업·대우실업 등 22개 기업 관계자들로 구성된 투자유치단은 컬럼비아대 김완희(金玩熙) 교수의 주선으로 현지에서 한·미간 전자산업 확대교류를 위한 실무자회의를 갖는가 하면 시카고·뉴욕·워싱턴·샌프란시스코 등 4개 도시에서 투자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한편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이 발족되던 즈음 다른 분야에서도 유사 기능의 조합들이 잇따라 탄생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전자계산용역수출조합이었다. 한국전자계산용역수출조합은 1972년 전광로(田光輅, 한국보험전산 사장)·이주용(李珠龍, 한국전자계산소 사장)·최태규(崔泰奎, 한국비지네스컨설턴트 사장) 등 키펀치(Key Punch) 용역업체의 대표들이 발기해서 만든 단체였다. 조합의 결성은 덤핑수출 등 업체간 과당경쟁을 방지하며 인력확보와 시장개척 등에 공동 대응하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키펀치 용역에 기대를 걸었던 정부도 이 조합을 통해 해외 시장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키펀치 용역은 카드펀치시스템을 이용해서 프로그래밍 순서에 따라 종이카드에 구멍을 내는 단순 작업이었지만 당시 사회적 시각은 이 업종이 컴퓨터와 직접 연관이 있다 해서 최첨단 소프트웨어산업의 하나로 보는 분위기였다. 작업물량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 기업의 전산실에서 받아온 것이었다. 이 점에서 정부도 키펀치 용역을 고부가가치의 수출산업으로 판단하고 있을 정도였다.

 수출조합을 통해 수출된 용역규모는 조합 발족 첫해인 1972년 한해만 60만5000달러, 이는 전년도 수출액의 11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조합은 또 1973년에는 244만달러, 1974년에는 468만달러를 각각 수출하는 등 한동안 수출역군으로서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키펀치 용역은 수출 확대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결코 바람직한 업종은 못되었다. 주요 수출국인 미국과 일본이 한국에 용역을 의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건비가 저렴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과기처 보고서를 보면 1972년도 한·미·일 3국 키펀치 근로자들의 시간당 용역단가를 보면 미국이 5.7달러, 일본이 3.65달러, 한국이 0.33달러였다. 해당 기업들 역시 고가의 키펀치 시스템들을 미국의 IBM·스페리 등으로부터 임차해서 사용하는 형편이어서 채산성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저렴한 인건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키펀치 용역은 결국 1974년을 고비로 사양길에 들어섰다. 한때 40∼50개에 달하던 기업들도 10여개 내외로 정리되면서 한국전자계산용역수출조합 역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