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넌 해냈구나. 난 처음부터 네가 해낼 것이라고 믿었지. 우리가 그렇게 헤매고 있던 텔렉스 교환장치를 개발해 낼 때 이미 알았지.』
배용정이 입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했다. 나에게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기다리고 있자 그는 말을 이었다.
『오늘 중으로 좀 만날 수 있을까?』
『무슨 일인데? 형, 난 요새 밤을 새우면서 일하고 있어요. 전화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지금 얘기해요.』
『나하고 같이 일하지 않을래?』
『형은 재벌기업에 들어갔잖아. 그곳은 옛날에 우리가 다니던 회사처럼 월급이 제때에 안나오는 일도 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 너하고 같이 일하고 싶어서 그래.』
『정말이야? 그렇다면 나로서는 환영하지 뭐. 오십만 달러가 들어오면 기술자를 두어 명 더 채용할까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잘 됐군요.』
그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큰 회사에서 일하는 그가 영세한 벤처기업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믿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배용정 선배는 나의 운명을 결정지어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 취직시험을 보았지만 떨어졌다. 달리 취업할 자리도 없고 해서 낙담에 젖어 있을 때 나를 컴퓨터회사로 불러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사환부터 시작했지만, 컴퓨터에 취미가 붙고, 외국 원서로 독학을 하면서 컴퓨터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나는 야망을 가질 수 있었다. 배용정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어야 했다.
그날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그는 내 사무실이 있는 종로 5가로 왔다.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그의 얼굴은 많이 핼쑥해졌다. 몸이 아프냐고 물으니까 별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머뭇거리더니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다고 하였다. 그가 사귀던 여자라고 했지만 나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사창가의 여자나, 술집의 여자와 가까이 지냈다. 짝사랑하던 여자와는 오래 전부터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말하는 사귀는 여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여자일 것이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어요?』
『그만 둔다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야 하니? 너하고 같이 일하고 싶다. 그 대신 나를 직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동업자로 취급해 주면 좋겠다. 내가 돈을 댈 수는 없지만, 기술뿐만이 아니라 영업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