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기획-뉴스&밀레니엄> 커버스토리.. 대덕을 "밸리"로 키우자

 90년대 초반 극도의 침체터널에 빠져 있던 미국경제를 건져준 것은 정보기술분야의 벤처기업들이었다. 이 벤처기업들의 발상지이자 벤처정신의 성지가 바로 서부 실리콘밸리다. 자본·인력·기술 등 인공적 조건과 기후·토양·지리 등 자연적 환경, 그리고 배후 도시시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첨단 산업기지로서 실리콘밸리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미국경제를 떠받치는 힘이자 전세계 벤처기술의 산실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나아가 전세계 국가들이 21세기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최우선 참조모델로 연구의 대상이 됐다. 연구결과로 나타난 곳들이 일본의 쓰쿠바첨단과학산업단지, 대만의 신죽단지, 말레이시아의 멀티미디어 슈퍼 코리더 등이다.

 국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95년 인천 송도지구의 미디어밸리를 시작으로 이른바 「밸리」 구축 사업이 한창이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지역산업 기반 마련을 위한 지자체들의 첨단밸리조성 노력은 치열한 유치 경쟁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애니타운(춘천), 영상도시화프로젝트(부산), 21세기 첨단영상도시화프로젝트(전주), 테크노파크 인터내셔널(포항) 등이 대표적 사례들로 꼽힌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밸리라는 이름의 첨단 기술산업단지 조성 열풍이 불고 있는 이유는 역시 실리콘밸리가 보여준 집단화의 시너지 효과 때문이다. 첨단기술과 기술의 상품화는 기술·인력·자본이 풍부한 토양속에서, 또 이들 기반요소간의 손쉬운 교류가 가능한 환경속에서 극대화 된다는 것을 실리콘밸리가 입증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까지도 실리콘밸리 모델이 제대로 정착된 나라가 없다는 데에 있다. 지난 수십년간 실리콘밸리의 탄생과 성장과정이 자연발생적인 흐름이었던 것에 비해 다른 여타 밸리 조성사업들은 인위적으로 급조되거나 실리콘밸리 현상 그 자체를 모방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밸리에 대한 회의론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까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실리콘밸리의 다이내믹스」라는 연구보고서에서 『국내에서는 실리콘밸리 같은 벤처단지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벤처기업이 활성화할 수 있는 토양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위적인 단지 조성만으로 벤처기업이 활성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행정·금융·국민의식 등 국가시스템부터 벤처기업에 적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지적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국·공립 및 민간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대학이 들어서 있는 대덕연구단지가 한국형 밸리 후보지로 집중 거론되고 있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대덕단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여타 지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연스런 기반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동안 밸리화 열풍속에서 비켜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최소한 첨단 기술연구단지만큼은 오래된 집단 군락지가 있다는 사실이 그 동안 잊혀져 왔던 것이다.

 대덕단지에는 총 61개의 국공립연구소와 민간연구소가 밀집돼 있고 석사 이상 연구원만 14000여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기술집산지이자 최대규모의 인력풀 지대. 여기에 KAIST·충남대 등 연구단지 내에만 4개 대학, 대전시 전체로 보면 15개 대학이 들어서 있다.

 면적만도 여의도의 4배에 가까운 834만여평에 이르고 있다. 대덕단지가 갖는 또하나의 강점은 비록 인위적 계획에 의해 조성되기는 했지만 이제는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학교·시장·베드타운 등 각종 배후 도시시설들이 들어설 만큼 들어섰다는 점. 이른바 「대덕밸리」 조성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이처럼 기본여건의 구비면에서 그 어느 지역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기 때문이다.

 보다 고무적인 것은 지난해부터 단지 출신 연구원들의 벤처창업 붐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고 연구소들도 이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또 올초부터 과학도시로 거듭나려는 대전시의 노력이 가시화되면서 이른바 「대덕밸리」 조성사업은 더욱 구체성을 띠어가고 있다. 과학기술부 역시 연구단지의 산업단지화를 위해 「대덕연구단지관리법」의 개정을 추진중이어서 힘을 보태줄 것으로 기대가 모아진다. 물론 대덕단지가 기술과 인적자원에 비해 자본 등 산업화를 위한 물적자원이 절대 부족하다는 점에서 대덕밸리가 단지 가능성에 머무르고 말것이라는 비관론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이 나오는 것은 성급한 마음으로 기업창업을 늘리고 자본을 인위적으로 모아 놓기만 했던 기존 정부정책의 한 단면을 입증해주는 사례일 뿐이다. 이제 명백해진 것은 대덕밸리의 조성이 공업단지를 짓는 것처럼 시기를 정해두고 일부 기업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구호를 외치며 자본을 유치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벤처기업가들도 실리콘밸리에서 배워야 할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평범한 기업가처럼 처음부터 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불굴의 벤처정신과 기술의 상품화에 목숨을 걸 만큼의 투철한 기업가 정신일 것이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당국자 역시 실리콘밸리가 발전 과정에서 보여줬듯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벤처정신이 발원이 되고 기업의 창업이 뒤따라 군락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적 환경 지원을 최우선 정책순위로 삼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나아가서는 벤처의 상품화를 위한 연구소들의 조직적인 노력 및 마인드 조성이 어우러질 때 대덕밸리의 실현은 더욱 앞당겨 질 것이다.

<김상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