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개척시대 이후 1세기 반이 지난 지금,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다시 골드 러시가 찾아왔다. 이곳에는 7000여개의 벤처기업이 산재하고 미국 전체 벤처자금의 40% 가량이 투자되고 있다. 실리콘밸리가 미국경제 부흥의 심장과 벤처기업의 메카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실리콘밸리 형성과정
실리콘밸리의 뿌리는 미국 대공항이 휩쓸고 지나간 193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탠퍼드대 공과대학 터먼 학장은 졸업생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제자였던 휴렛과 패커드에게 모교 근처에 창업할 것을 권유했다. 휴렛과 패커드는 38년 인근 팰러앨토시의 한 차고에서 실리콘밸리 1호 기업인 휴렛패커드를 설립했다. 이것을 계기로 「차고」 창업이 잇따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이 지역으로 다시 돌아와 전쟁기술을 민간산업에 적용하기 위해 기업들을 설립했다. 미국 정부도 국방 프로젝트에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대학에서의 연구개발이 활발히 진행됐다.
53년 스탠퍼드대가 캠퍼스 부지에 산학협동 산업화단지를 마련하자 여러 기업들이 입주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스탠퍼드산업단지 입주기업의 업종은 마이크로웨이브 분야가 주종이었지만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쇼클리가 55년 이곳에 쇼클리 세미컨덕터를 세우면서 반도체분야가 급부상했다. 59년에는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의 킬비와 페어차일드사의 노이스가 이곳에서 최초의 집적회로(IC)를 개발함으로써 스탠퍼드산업단지는 전세계 고집적 반도체 개발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54년 록히드 항공사의 미사일개발부문이 입주하면서부터는 항공산업분야가 새로운 업종으로 추가됐다. 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로 자존심이 구겨진 미국 정부가 스탠퍼드산업단지의 반도체 및 항공회사를 통해 명예회복을 다짐하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이를 계기로 스탠퍼드산업단지는 군·산·학 협동 프로젝트의 중심무대가 됐다. 이후 70년대 말까지 오렌지농장지대였던 팰러앨토 일대에는 민·관·산·학이 서로 연결되는 거대한 첨단 과학산업단지가 형성됐고 마침내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실리콘밸리의 성공 요인
실리콘밸리가 미국경제의 중심이며 세계적인 벤처의 성지로 정착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아닌 어떤 위험에도 굴하지 않는 벤처정신과 투철한 기업가정신이었다. 벤처정신과 기업가정신은 곧 실리콘밸리 전체를 민간주도로 발전시키는 자생력이 됐다. 여기에 우수 전문인력 공급체계, 벤처캐피털·에인절의 자금지원체계 구축 등이 힘을 보탰다. 인프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우선 투철한 벤처정신과 기업가정신은 실리콘밸리 성장사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로 꼽힌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적지않은 예산을 벤처기업 활동에 지원했고 국방프로젝트 등을 발주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측면지원일 뿐이었다. 실리콘밸리는 스스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 변화하면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어왔다.
두번째, 기업들의 자생력 확보는 실리콘밸리내 기업조직원들의 개방적이고 네트워크적인 인간관계가 큰 도움이 됐다. 벤처기업가와 투자가 등 각계인사가 지속적으로 만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정보·자본·인력을 끊임없이 교환하는 데서 실리콘밸리의 성공이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우수 전문인력 공급체계는 학교·연구소·기업 3자간 정보와 지식 공유 네트워크가 잘돼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리콘밸리 인근에는 스탠퍼드대를 비롯, 캘리포니아주립대 등 두꺼운 대학층이 있다. 이들 대학 출신의 우수한 인재가 경영자, 기술자 등 기업에 필요한 각종 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두꺼운 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현실에 도움이 되는 실용학문을 표방하고 1891년 개교한 스탠퍼드대는 실리콘밸리 정착의 뿌리이자 원동력이 됐다.
세번째, 벤처캐피털·에인절펀드 등의 자금지원체계도 오늘날 전세계 거의 모든 벤처캐피털회사들의 모델이 됐을 만큼 큰 역할을 했다. 현재 100여개의 벤처캐피털회사들이 성업중인 실리콘밸리에는 건당 2000만∼3000만달러의 대규모 컨소시엄 투자가 보편화돼 있다. 지난 98년에는 모두 33억달러가 투자됨으로써 97년 대비 14%의 증가세를 나타냈다. 특히 이곳의 벤처캐피털회사들은 아무런 담보없이 투자를 감행, 사업에 따르는 리스크와 이익을 함께 나누는 시스템을 공유하고 있다. 벤처캐피털의 몇배에 이르는 투자를 하는 에인절도 벤처기업에 담보없이 돈줄과 경영 노하우를 제공하고 지분을 나눠 받고 있다.
<온기홍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