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벤처기업 (252)

 내가 실리콘밸리 모험을 시작할 무렵 한국의 컴퓨터계는 방황기를 마치고 도약을 시작할 무렵이다. 교육용 컴퓨터의 보급은 아주 미세하였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PC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PC시장은 주로 외국업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국산 컴퓨터라 할지라도 완제품이라고 할 수 없었다.

 세계 PC시장은 IBM과 애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텐디·오스본·쿠퍼티노·코모도어·아타리·타이멕스 등이 활동했다. 미국 회사들이 패권을 잡기는 했지만 십여개의 업체들이 군웅할거하는 정도였다. 이 PC들은 거의 모두 다른 소프트웨어와 호환성이 없었다. 한국의 컴퓨터 업체들은 IBM이나 애플 것을 호환시키는 복제품을 생산했다.

 그때 나에게 들려온 반가운 소식은 정부에서 국가기간전산망 시스템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그 전산망 시스템이 내가 추진하는 자동화 시스템(공장자동화·사무자동화)과 같은 개념이었기 때문이었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은 행정전산망·금융전산망·교육연구전산망·국방망·공안망을 두고 한 말이었다.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82년이었지만, 84년 3월에 정보산업육성회를 국가기간 전산망조정위원회로 개칭하고, 같은 해 6월에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추진 보고가 있었다. 86년 5월에 전산망 보급 확장과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같은 해 12월에 전산망 보급 확장과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87년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매우 기뻤으나 세월이 흘러도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았다. 계획안이 나온 이후 4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김이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1984년 가을에 FA­33이라는 제품번호로 기술특허를 출원한 직조기계 자동화 시스템을 일본에 팔았다. 다이묘 주물 공장에 계약을 하러 동경에 들려서 일주일간 머무는 동안 나는 호텔에서 묵지 않고 기술과장 후쿠오카의 집에서 지냈다. 일본의 주택은 비교적 비좁은 편이었는데, 나는 후쿠오카의 누이동생이 쓰는 방을 사용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동안 그녀는 중학교 다니는 조카와 함께 방을 썼다. 후쿠오카의 동생 스즈키는 도쿄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졸업반 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