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학공업 육성계획
정부가 철강·비철·화학·기계·조선 그리고 전자 등 6개 업종이 포함된 중화학공업을 중점 육성하기 위해 경제기획원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1973년 3월이었다. 소속은 국무총리 산하였지만 위원회 사무국장을 대통령 특별보좌관이 겸임하는 형태라서 실제로는 대통령 직속기구나 다름없었다.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설치는 1971년 7월1일 제7대 대통령 취임사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날 취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공업의 한계성과 안보 환경의 악화를 지적하고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자고 역설했다.
『…나는 통일과 중흥이 반드시 우리 시대에 이뤄질 수 있다고 자신하며 이를 성취하는 열쇠는 오로지 우리 자신의 힘, 즉 국력을 기르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중략>…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민주발전의 자양요소며 민주사회의 성장은 통일기지의 확보인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중화학공업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며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곧 중진국의 상위국에 올려놓고야 말 것입니다.…』
취임사에서 박 대통령은 국력의 배양이 통일의 관건이며 국력은 중화학공업의 수출입국으로 배양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중화학공업의 여건은 매우 미숙한 상태였다. 전자와 기계 등 대다수 분야가 대규모 자본과 함께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산업인 반면 한국 기업의 능력은 매우 취약했다. 기대할 것은 오로지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뿐이었다. 경제계는 물론 경제개발의 기수인 경제기획원 관료들조차도 내실은 중화학공업의 본격 육성에 불가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추진주체인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대통령 취임사가 있고 난 뒤 20여 개월이 지나서 구성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추진주체가 구성되자 정부는 대통령의 의지대로 육성을 위한 종합계획, 입지계획, 부문별 계획, 육성에 관련된 제반지원계획 등의 지원에 본격 나섰다.
1973년 5월24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되는 1981년까지 8개년 동안 6개 업종 분야에 대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1981년까지 매년 분야별 생산량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 매년 얼마의 예산을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가를 적어 놓은 것이 그 골자였다. 그러나 각 분야 육성계획은 이미 1972년부터 시작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은 3∼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중화학 부문을 따로 떼어낸 다음 내용을 더욱 구체화하고 목표량을 높게 제시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이 입안되던 1973년 5월 당시의 정부 경제팀은 태완선(太完善) 경제기획원 장관, 남덕우(南悳祐) 재무부 장관, 이낙선(李洛善) 상공부 장관, 신상철(申尙澈) 체신부 장관, 최형섭(崔亨燮) 과기처 장관, 정소영(鄭韶永) 청와대 제1경제수석 등이었다. 1973년 9월에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산하에 차관보급이 참여하는 추진기획단이 신설됐는데 정소영의 바통을 이어받은 김용환(金龍煥)이 기획단장이 됐다. 기획단에는 서석준(徐錫俊) 경제기획원 차관보 등이 핵심인물로 참여했다. 이에 앞서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던 김용환은 추진위원회가 구성될 당시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그 뒤로도 1970년대 말까지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던 오원철(吳源哲) 청와대 경제수석, 최각규(崔珏圭)·장예준(張禮準) 상공부 장관 등이 추가로 가세했다. 사실상 3공화국을 이끌던 핵심 경제관료들이 모두 이 위원회를 거쳐간 셈이었다. 하지만 국가 최고 경제브레인들이 직접 참여해서 입안했던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에는 치명적 오류가 하나 있었다.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유류(油類) 의존도의 심화였는데 초기 육성계획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유류 수요를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국제 유가 변동에 대한 파급효과는 경제개발계획이나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자체를 뒤흔들 만큼 위력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1973년 10월, 그러니까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이 발표된 지 불과 5개월도 안된 상황에서였다.
제1차 오일쇼크는 1973년 10월17일 석유수출기구(OPEC)가 국제 원유고시가격을 배럴당 17% 인상하고 매월 원유생산량을 전월대비 5%씩 감산키로 결정함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한 서방세계의 에너지 위기를 말한다. 1차 오일쇼크는 1973년 10월6일 발발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간 제4차 중동전쟁이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유가인상은 OPEC회원국 중 페르시아만 연안의 아랍 민족주의 진영 6개국이 주도한 것이었다. 오일쇼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74년 1월 OPEC가 다시 배럴당 5.119달러에서 11.651달러로 100% 이상 인상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던 서방세계의 경제는 파탄 직전까지 갔고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만연하게 됐다. 이른바 보호 민족주의와 자원무기의 위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국내에서도 제1차 오일쇼크에 대한 여파로 도매물가지수(85년 기준)가 1973년 19.3%에서 1974년 27.4%로, 1975년에는 다시 34.6%로 치솟았다. 실업률은 4%를 웃돌았고 14%까지 치솟았던 경제성장률은 8.5%대로 곤두박칠쳤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와 경제기획원이 앞장 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의 전면 수정을 청와대에 요청했다. 경제계는 자원과 원료공급 사정을 감안한 비교우위에 입각해서 부존자원과 생산력 구조와의 통합성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기술지향적 산업으로서 노동력 의존도(노동계수)가 비교적 높은 부문에 대한 투자와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측근들의 생각은 달랐다.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은 원래부터 대북 안보우위나 권위주의 체제의 업적 정통성 요구 등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당연히 경제적 관점보다는 정치적 고려가 우선될 수밖에 없었다. OPEC가 유가의 추가 인상을 발표한 직후인 1974년 1월18일 박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다만 에너지 문제가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 소비가 비교적 적은 부문을 우선적으로 추진해 나가자, 예를 들면 전자공업이라든지, 조선이라든지…<중략>…그밖에 다른 사업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조정이 있겠습니다만 전반적인 기본계획은 수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해드립니다.…』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에서 전자 분야가 비교우위 업종으로 지목되자 업계는 바빠졌다. 전자 분야에서도 업계 관심 품목과 우선 육성 대상 품목이 바뀌었다. TV 등 세트 생산 중심이던 것이 부품이나 재료생산 위주로의 전환이 적극 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전자산업은 TV 조립생산 위주였는데 소요되는 부품이 대부분 완제품 수출을 전제로 한 수입품으로 충당되고 있어 사실상 외국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바로 이들 부품과 소재를 우선 국산화 품목으로 집중 투자키로 한 것이었다. 태평양화학과 풍산금속 등 전자업종과 무관하던 회사들이 자성재료 전문업체인 태평양금속과 반도체 리드프레임 전문업체인 풍산특수금속 등을 출범시킨 것도 이즈음이었다. 한국마벨은 홍콩에 가변저항기 수출거점을 세웠다. 김향수(金向洙)가 고군분투하던 집적회로(IC) 전문 아남산업이 세트 분야에서도 달성하기 힘든 4400만달러의 수출을 기록한 것도 이 때였다. 아남산업은 이 때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의 컬러TV 생산에 나서게 된다.
전자업계를 대표하던 민간단체들도 나름대로 결단을 내렸다. 오일쇼크 직전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단일 이사진을 구성했으나 활동이 지지부진하던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 회원사들도 싸니전기 곽태석(郭泰石) 사장의 주도로 모처럼의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삼화콘덴서·삼미기업·남성흥업·고려전자·동남전자·한국마벨 등 전자부품·반도체회사 대표들은 금성사·대한전선 등 세트 생산회사들의 수출경쟁력을 강화시켜 주기 위한 방편으로 IC·저항기·트랜지스터·스피커 등의 공급가격을 일률적으로 20%씩 인하키로 결정함으로써 업계의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원래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가운데 전자 분야는 상공부 중공업국장을 반장으로 경제기획원·체신부·과기처 과장급 관료와 업계·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한국정밀기기센터(FIC) 등의 소속 전문가들이 모여 입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자 분야는 다른 분야에 비해 유독 그 내용이나 구체성이 빈약했다. 이에 대해 1973년 5월 때마침 청와대를 방문했던 김완희(金玩熙) 컬럼비아대 교수가 의문을 가졌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 대신 정소영 경제수석이 이렇게 대답했다.
『전자 분야는 이미 김 교수의 보고서를 토대로 1969년에 작성된 「전자공업육성 8개년 계획」이 있지 않습니까?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중에 전자 분야는 전자공업육성 8개년 계획을 그대로 실천할 방침이어서 간단히 다뤘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아직 육성방안이 마련돼 있지 않아 자세하게 다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