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을 파헤친 스타 검사 보고서가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자 전 세계 네티즌들이 이 보고서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바람에 보고서를 공개한 사이트가 한동안 불통되는 등 사회적으로 대단한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이 며칠 동안 인터넷을 통해 스타 검사의 보고서를 본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무려 수천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인터넷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스타 보고서가 인터넷에 공개됨으로써 국민의 동정론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여있던 클린턴 대통령은 보고서의 적나라한 내용을 본 여론의 비난과 국민의 외면으로 큰 곤경에 처했다.
정치
정보통신 전문가들은 이 사건을 98년 정보통신 분야 세계 10대 빅뉴스의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터넷이 단순한 정보의 교환 차원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로 부상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일이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서도 가능해진 것이다. 또 시간과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방금 전에 일어난 사건이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시대가 됐다.
이같은 인터넷의 보급 확대는 사이버 정치시대라는 새로운 조류를 가져다주고 있다.
사이버 정치는 크게 두가지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정당과 정치인들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단체와 개인들의 영역이다.
사이버 정치를 모르는 정당이나 정치가는 앞으로 설 땅이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듯 세계 각국의 정치 지도자와 정당들은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사이버 민심잡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경제의 글로벌화와 함께 정보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사이버 정치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선거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의 정당과 의원들은 대부분 자신의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지역구 관리는 물론 자신의 정책을 일반인에게 전달한다. 지역 주민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것뿐 아니라 평소 생각들을 여과 없이 듣는 열린정치 참여마당을 꾸미고 있다. 선거가 닥치면 인터넷 홈페이지는 즉시 사이버 선거캠프로 꾸며진다.
지난 96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밥 돌 후보의 홈페이지는 실제 선거운동 현장 못지않게 열기를 뿜으며 선거전을 치렀고 내년 대선을 향해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의 고어와 게파트, 공화당의 부시2세와 깅리치 등 대선후보들도 자신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정책선전을 벌이거나 네티즌과의 대화에 나서는 등 인터넷을 통한 선거전에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서도 총선과 대선이 있을 때면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정치운동이 불을 뿜는다.
국내에서 인터넷에 정치인 홈페이지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부터다. 이때부터 PC통신을 통한 전자민주주의를 시도하는 정치인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홈페이지를 갖고 있는 의원은 3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대부분의 의원들은 인터넷과 사이버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만들어져 있는 국회의원들의 홈페이지도 단순한 홍보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의 데이터는 찾아볼 수 없고 1, 2년 전의 데이터가 그대로 방치되는 등 운용에 있어서도 부족한 점이 많은 실정이다.
그러나 정당이나 국회의원 개인 차원에서 인터넷을 이용한 정치활동과 대국민 서비스에 적극 나서는 사례도 많다. 국민회의가 지난 4월에 출범시킨 사이버 개혁국회는 사이버상에서 국회를 구성해 일반 국민들이 국정을 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또 법관 출신 국회의원들이 홈페이지를 통해 법무관련 상담활동을 벌이거나 일부 의원들이 국정감사 때 시민들의 제보를 받아 정부의 잘못을 질책하는 등 인터넷을 이용한 정치활동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정당과 정치인들의 사이버 정치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것이라면 시민단체와 개인의 사이버 정치는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의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홈페이지의 운용에 관심이 소홀한 것은 아직까지 국민들의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돼 있지 않은 환경에도 원인이 있다.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마련한 게시판에는 한달에 서너건 정도의 메시지만이 올라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도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의견이나 민원을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이나 국회의원들이 사이버 정치활동을 「보여주기 위한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다면 시민단체들의 사이버 정치활동은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지역별·사안별로 흩어져 있는 조직을 인터넷을 통해 통합시켜 정보를 교류하고 행동을 통일하는 등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직 사이버 정치는 영향력면에서나 이용면에서 기존의 정치활동을 대체하거나 능가하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이버 정치가 진정으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사이버 공간에서 보다 원활히 이뤄질 때 가능하다. 인터넷의 강점은 그것이 과거의 어느 매체에서도 할 수 없었던 양방향성과 다양성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 정치가 뿌리를 내리게 되면 인터넷은 보다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정보를 유권자와 정치가 사이에서 양방향으로 제공할 수 있으며 선거과정은 물론 정부의 통치과정에도 국민이 단순한 납세자가 아니라 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국회
새정치국민회의는 「21세기 정치개혁의 미래지향적 모델을 가상공간에서 실현해 나간다」는 기치를 내걸고 지난 4월 제1기 사이버 개혁국회(webpol.ncnp.or.kr/about)를 개원했다.
이 사이버 개혁국회는 전국의 네티즌을 대상으로 입후보자 추천을 받고 다시 선거를 통해 20명의 지역구 의원을 선출했다.
사이버 개혁국회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매우 높아 20명을 뽑기 위한 선거전에 200명이 넘는 후보가 등록해 10 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2만4000명이 투표에 참가했다.
등록후보도 대학생, 대학교수, 컴퓨터 엔지니어, 레지던트, 목사, 군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이버 국회를 통해 현실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개선점을 찾아가는 등 정치활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사이버 개혁국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 정치와 사이버 정치 사이의 벽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만을 입증시켜 주었다.
당초 국민회의측은 『전자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사이버 국회의원을 선출해 가상공간에서 정치와 국민이 만나는 장을 마련하여 정치적 거리감을 줄이고 실제 국회의원과 사이버 국회의원간의 정책의견을 교환하는 장을 마련하겠다』고 취지를 밝혔으나 이같은 약속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사이버 국회는 매달 두차례의 사이버 회의를 열도록 했는데 온라인에서 실시간 문자 채팅으로 이뤄지는 회의는 2차회의 때부터 참가 의원들의 수가 현격히 줄어 매월 2회씩 개최키로 했던 회의도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오는 10월이면 새로운 임기가 시작돼 늦어도 이달 중에는 제2기 사이버 개혁국회의원을 뽑아야 하지만 사이버 국회 운영을 맡고 있는 국민회의 홍보위원회측은 아직도 선거계획을 잡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 개혁국회가 이처럼 유명무실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사이버 정치에 대한 정치권과 시민들의 인식부족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정치권은 사이버 국회를 통해 수렴된 민의를 적극 수용하고 네티즌들은 사이버 정치활동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 최선의 대안을 찾아 나갔어야 했다는 것이다.
또 회의시간이 업무시간 중이거나 퇴근시간대에 걸림으로써 참석률이 저조해지고 온라인 채팅에 20명 이상이 한꺼번에 참석하는 등 회의방식이 비효율적이었으며 오프라인 만남을 통한 의원들간의 교감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등도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마디로 사이버 개혁국회는 출범 6개월 만에 좌초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이버 개혁국회가 비록 경험과 인식부족으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으나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언젠가는 기존 정치의 폐단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 기대해 본다.
<김병억기자 be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