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29);제 3부 국산화와 수출의 시대 (5)

삼성의 도전

 한국 전자산업 40년사에서 금성과 삼성이라는 양 별(星)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여하튼 그 공과를 떠나 두 별은 한국의 전자산업 40년을 서로 밀고 당겨온 견인차였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선발주자로서 금성과, 후발주자로서 삼성은 여러 분야에서 실리와 명분을 놓고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였다. 그 가운데서도 널리 알려진 네번의 대형 충돌사건이 있었다. 그 첫번째는 1969년 삼성물산이 일본 산요전기(三洋電機)와 합작으로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하자 금성이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을 동원, 저지에 나선 사건으로 본란 21호 「이병철의 등장」에서 자세하게 다룬 바 있다. 두번째는 1980년 컬러TV 방영을 앞두고 벌어졌던 1970년대 후반 치열한 내수 선점 경쟁, 세번째는 1980년대 초반 해외 진출 경쟁, 네번째는 1980년 중반 반도체(D램) 개발 경쟁이었다. 4개 사건의 특징은 첫번째와 두번째의 경우 선발인 금성이 후발인 삼성의 추격을 뿌리치는 성격이 강했던 반면 세번째와 네번째는 반대로 삼성이 금성을 추월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1969년 금성에 10년 뒤져 출발한 삼성이 금성과 대등한 힘을 축적하게 되는 시기가 1970년대 초반이다. 금성이 독일과 일본에서 자본 및 기술을 들여와 완제품 생산에 주력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삼성은 주로 일본과 미국에서 기술을 들여와 완제품 생산에 나섰다. 달랐던 점은 가전 완제품 생산 외에 금성이 초창기부터 전선과 자동 교환기 등 전기통신기기 생산에도 주력했던 반면 삼성은 전자부품과 소재 생산에 주력했다는 사실이다.

 완제품 분야에서도 금성은 1970년대 초반 품목다양화를 시도했던 반면 삼성은 경험과 기술의 일천함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오로지 TV·냉장고 등 일부 품목의 생산에만 치중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삼성의 투자가 집중됐던 분야가 바로 브라운관·실리콘트랜지스터·튜너·고압트랜스 등의 부품과 브라운관용 유리벌브 등의 소재였다. 삼성은 이같은 전략을 완제품에서 부품·소재에 이르는 수직계열화시스템이라 부르며 박차를 가했다.

 1974년까지는 삼성이 수직계열화시스템 정착에 전력투구함으로써 전자분야에서의 성장기반을 닦았던 시기였다. 출범후 1974년까지 5년 동안 삼성은 삼성전자공업·삼성산요전기·삼성NEC·삼성일렉트릭스·삼성산요파츠·삼성코닝 등 6개사를 설립하고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공업·삼성산요전기·삼성NEC는 모두 1969년에 설립됐다.

 「이병철의 등장」에서 소개한 대로 삼성전자는 TV와 라디오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서 모회사인 삼성물산이 투자한 것이고, TV·라디오·테이프리코더 등 완제품과 관련부품을 함께 생산하는 삼성산요전기는 삼성물산이 일본의 산요전기와 합작한 회사였다. TV용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삼성NEC 역시 삼성물산과 일본전기(NEC)가 합작한 회사였다.

 1970년대 들어 삼성은 큰 고민이 하나 생겼다. 삼성전자와 삼성산요전기의 생산품 중 라디오·TV 등 세트 분야에서 시장 중복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삼성산요전기는 원래 정부가 수원공장의 생산품 전량을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인가한 회사였지만 1972년부터 조건이 완화돼 내수 공급 확대가 꾀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산요전기가 삼성산요전기에 독점 공급키로 돼있던 부품·재료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지면서 급기야는 삼성전자와 산요전기간의 마찰로 이어졌다. 이 마찰은 1972년 삼성전자가 삼성산요전기와 경쟁분야의 제품 생산에 박차를 가하면서 결별 수준으로까지 치달았다.

 때마침 1969년 출범 당시 체결됐던 3년의 기술제휴기간이 1972년 8월로 종료되면서 양측이 재협상에 들어갔다. 6개월 여의 협상 끝에 발효된 합의각서는 기술제휴를 다시 3년간 연장하고 내수용 TV와 라디오 등의 생산 및 로열티 배분 등에 대해 양측이 삼성산요전기를 중심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합의각서에 들어있던 또 다른 내용이 바로 삼성산요파츠 설립 건이었다.

 일본 산요전기는 원래 단독투자 혹은 제3자와의 합작투자를 통해 구미전자공단에 전자부품회사를 설립할 예정이었다. 재협상에서 삼성은 산요의 전자부품공장 설립계획을 삼성전자와 삼성산요전기의 공장시설이 모여 있는 수원단지에 유치키로 하고 25%의 지분을 확보키로 한 것이었다.

 1973년 8월 삼성전자·삼성산요전기·산요전기·산요전기무역 등 4사가 공동 투자하는 자본금 8100만원 규모의 삼성산요파츠가 설립됐다. 삼성측의 지분은 25%였으나 한국측 대표이사와 일본측 비상근 대표이사가 동시에 선임됐다. 1975년까지 두번의 증자가 이뤄졌는데 이 과정에서 삼성이 산요측 지분 가운데 37.5%를 사들여 결국 62.5 대 37.5로 삼성이 지배주주가 됐다.

 삼성산요파츠는 수원단지 내에 2만5000평의 공장이 완공되자 1973년 10월부터 그동안 삼성전자와 삼성산요전기가 분담하던 VHF튜너·편향코일·고압트랜스·전해콘덴서 등 4개 TV 핵심부품 생산에 돌입했다. 생산규모는 튜너·편향코일·고압트랜스가 각각 월 4만개, 전해콘덴서가 월 4만5000개 정도였다. 삼성산요파츠는 1974년 3월 계열사인 삼성산요전기와 삼성NEC가 상호를 각각 삼성전기와 삼성전관으로 변경하자 함께 삼성전기파츠로 개명했다.

 삼성전기의 경우는 1977년 삼성전자에 완전 합병돼 법인이 소멸됐고 삼성전기파츠는 같은 해 삼성전자부품으로 상호가 바뀌었다. 그 뒤 삼성전자부품은 1987년 종업원 1만명, 수출실적 3억5000만달러의 국내 최대 일반전자부품회사로 발돋움하면서 사명을 삼성전기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삼성전기는 삼성산요전기가 개명한 삼성전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회사다.

 삼성코닝은 삼성NEC의 흑백브라운관 생산에 대한 수직계열화시스템 구축의 일환으로 1973년 6월 삼성전자와 미국 코닝글라스웍스(Corning Glass Works)의 자회사인 코닝인터내셔널과의 50 대 50 합작으로 설립됐다. 삼성코닝은 1975년 4월부터 수원단지에서 브라운관용 유리벌브라는 특질유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 국내에는 특질유리 생산에 대한 기술축적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정부는 원래 삼성코닝의 흑백브라운관용 유리벌브 생산공장(벌브融着공장) 설립을 몇가지 조건을 내걸고 허가했다. 유리벌브 생산은 벌브 융착에 앞서 유리 용해 과정이 필요한데 정부가 판단하기로는 삼성코닝이 당초 신청한 연산 200만개 수준으로 용해공장까지 설립하기에는 채산성이 없어보였다. 따라서 국내 흑백TV의 수요가 용해공장 신축에 필요할 만큼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 1976년까지 삼성코닝으로 하여금 용해공장 설립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유리벌브를 생산하던 미국·일본·프랑스·대만 등의 경우 TV방송의 세계적 추세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뀜에 따라 흑백브라운관용 생산라인을 폐쇄하거나 컬러브라운관용 생산라인으로 전환하는 때였다. 정부와 삼성은 고민 끝에 선진국들이 중단한 흑백브라운관용 유리벌브 공급량을 모두 확보하면 시장전망이 매우 밝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결정에 따라 삼성은 용해공장 착공시기를 1년 앞당기면서 동시에 연산 능력을 200만개에서 350만개로 늘렸다. 이 예상은 들어맞아 삼성코닝의 흑백브라운관용 유리벌브 생산은 1979년 연산 500만개까지 늘어나 이 분야 세계 1위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한국반도체는 모토롤러 등으로부터 마이크로웨이브 등을 수입하던 오퍼상 켐코(KEMCO)가 1974년 1월 미국 ICII사와 50 대 50으로 합작 설립한 반도체 웨이퍼가공전문업체. 그러나 설립과 동시에 경영난으로 휘청거리면서 삼성이 ICII측 지분 50%를 인수하고 한국반도체의 경영에 본격 참여했다. 한국반도체는 설립전인 1973년 10월 경기도 김포군 오정면(현 부천시 오정동)에 3788평의 초현대식 웨이퍼가공 생산 공장 착공에 들어가 이듬해 10월 완공을 보았다. 한국반도체는 당시로서는 초고가인 20만달러 짜리 이온주입기 등 최첨단 3인치 웨이퍼가공 생산장비를 갖추고 상보성금속산화막반도체(CMOS)기술 기반의 고집적회로(LSI)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착공과 함께 터진 제1차 오일쇼크 영향으로 자금압박을 받게 됐다.

 삼성이 ICII측 지분 50%를 인수한 직후인 1974년 12월부터 한국반도체는 경영이 정상화돼 1975년 9월 CMOS인 「KS5001」을 생산하게 됐다. 「KS5001」은 6기능 발광다이오드(LED) 전자손목시계용 LSI제품으로서 이 분야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네번째 쾌거였다. 당시 「KS5001」은 수출 시세가 5∼8달러나 되는 데다 생산라인을 24시간 가동해도 수요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인기 제품이었다. 삼성은 1977년 12월 켐코로부터 나머지 지분 50%를 인수해 완전한 그룹사로 편입시켰다. 한국반도체는 1978년 3월 한차례 상호를 삼성반도체로 변경한 뒤 1980년 1월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됐다.

 삼성일렉트릭스는 삼성전자가 공급하는 제품의 개발과 생산을 전담하는 자회사로 1971년 9월 출범했다. 이 방침에 따라 삼성전자는 삼성일렉트릭스가 생산한 제품의 판매만 맡기로 하는 형식상의 2원체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1972년 삼성이 전자사업 전반의 운영효율화를 위해 완제품과 부품 사업의 수직계열화 전략을 구사하면서 삼성일렉트릭스는 1973년 3월 다시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