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어린 백성」을 위해 새로 28자를 만들어 놓고 왜 훈민정자(訓民正字)가 아니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불렀을까.』
한글 정보화를 선도하는 국어정보학회 진용옥 회장(경희대 전파공학계열 교수). 그에게 한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 대답 대신 던진 화두다. 그는 대학에서는 통신공학을 가르치지만 10여년 전부터 틈만 나면 훈민정음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음악에는 화성이 있고 물리학에서는 간섭현상, 통신에는 변조가 있지요. 이 모두가 파동과 관계가 있습니다. 음악·통신·물리학이 각각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 훈민정음입니다.』
어떻게 한글연구에 심취하게 됐는가를 에둘러 설명하면서 진 회장은 이미 통신공학자가 아닌 국어학자가 돼 있었다.
『말에는 보이지 않는 음률구조가 숨어있습니다.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음률을 이해하는 겁니다. 세종대왕은 말 속의 음률을 분석해 기호로 만들었고 그래서 정음이라 칭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훈민정음의 과학성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몸서리를 칠 정도로 심취해 있다. 이는 진 회장이 한글을 「한글」이란 말 대신 「정음」으로 부르자고 하는 이유기도 하다.
물론 진 회장이 정음의 과학성에 대해 개인적 관심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국어정보학회를 중심으로 뜻맞는 학자들을 규합, 훈민정음의 세계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다분히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막연한 민족주의는 결코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정음의 과학성을 입증하는 것이 공학자로서의 임무』라고 강조한다.
이 프로젝트가 바로 「온누리 보편화 글편기(Global Writing System)」의 제작. 이것은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거나, 문자 자체가 어려워 문자생활이 보편화하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에서 훈민정음을 자신들의 문자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목표로 진행하는 일종의 다국어 처리 워드프로세서다. 민족분단에 의한 한글의 이질화를 막고, 우리글을 범민족차원에서 확대 발전시키자는 깊은 뜻도 담겨 있다. 현재 영역별로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해 자판설계, 내부 코드체계, 글꼴을 만들었고 조만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할 계획이다.
그가 한글만큼이나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가 바로 민족 통일. 그는 94년부터 남북의 국어학자와 컴퓨터 학자들이 해마다 벌이고 있는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대회」의 남쪽 단장을 맡고 있다. 이 학술회의를 통해 그동안 남북 공동의 컴퓨터 자판기, 남북 한글 자모순 통일안, 컴퓨터 용어 통일사전 등 가시적인 성과물이 나온 바 있다. 정음의 세계화를 위한 「온누리 보편화 글편기」의 공동개발을 북한에 제의해 원칙적인 합의를 이끌어낸 것도 남북 합의안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 차원에서 합의안을 도출해낸 이러한 성과물들은 이후 남과 북 내부에서 더이상 건설적인 논의과정이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통일은 정보시대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통일 이전에 민족의 화해가 선행돼야 하는데 화해의 최고 방법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진 회장은 남북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본적인 작업이 바로 말과 글, 그리고 말과 글을 컴퓨터에 담을 정보처리 연구라고 강조한다. 내년 남북간 학술대회는 8월 중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성도인 우름치에서 한글의 세계화를 주제로 개최하기로 북측과 합의한 상황.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컴퓨터 시대에 대비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진 회장은 끝으로 시작은 세종대왕이 했지만 「정음의 세계화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은 자신이 하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약력
△43년 일본 출생 △59년 체신고등학교 졸업 △68년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 석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전자통신공학 박사
◆경력
△70년 체신부 4급 공채 1기 △75 ∼ 79 광운대 통신공학과 교수 △79 ∼현재 경희대 전자정보학부 전파공학 교수 △90 국어정보학회 부회장 △93 ∼ 95 한국음향학회 회장 △95 ∼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대회 단장 △한국통신문화재단 이사 △97 문화체육부 국어심의회 국어정보화 분과위원회 위원 △99 국어정보학회 회장 △새천년위원회 지식정보부문 자원봉사자
김상범기자 sb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