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81년 서울대 신문학과 졸업
◇92년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입사
◇현재 종합유선방송위원회 평가관리 부장
방송 환경이 바뀌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방송규제 방식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1일까지 3일동안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방송 관련 규제기관 비공식 모임인 아·태 지역 규제 라운드테이블(the Regulatory Roundtable for Asia and the Pacific) 회의에서는 새롭게 변화하는 각국의 방송규제방식 등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으로 대변되는 규제환경의 변화, 인터넷 발달에 따른 국제화의 급진전,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주권을 지키기 위한 소위 로컬 콘텐츠(local contents) 육성과 관련된 정보를 교환·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비공식 국제회의인 라운드테이블 회의는 지난 96년 당시 호주방송위원회(ABA:the Australian Broadcasting Authority) 위원장인 피터 웹의 제안으로 시작했다.
이 회의는 지난 96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회의를 시작으로 일본(97년 2차 회의), 한국(98년 3차 회의)에 이어 싱가포르에서 4차 회의가 열렸으며 내년 5차 회의는 뉴질랜드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13개국에서 24명의 대표가 참석한 이번 회의에서 토론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규제 완화가 폭넓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지식에 기초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뉴미디어 성장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싱가포르는 최소규제를 지향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는 98년에 통과된 방송통신법(the Communications and Multimedia Act)과 말레이시아 방송통신위원회법(the Malaysian Communications and Multimedia Act)에 규제완화를 기본원칙의 하나로 천명하고 있다.
최근 규제정책에 관한 컨설팅보고서 작성을 완료한 홍콩도 지난 95년 3개의 통신사업자를 허용하는 등 규제를 완화한 데 이어 케이블TV와 전화사업의 교차진출, 위성을 비롯한 유료서비스의 개방, 교차소유 허용 등을 골자로 하는 방송과 통신의 융합, 디지털방송에 대비한 폭넓은 규제완화를 단행할 방침이다.
규제 완화의 대표적인 예는 뉴질랜드다. 뉴질랜드에서는 94년 전분야에 걸친 규제완화를 시행했으며, 방송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에도 존재하는 외국인 참여 제한을 포함한 소유구조에 관한 규제가 뉴질랜드에서는 전혀 이뤄지지 않을 정도다. 방송국에 대한 허가제도 존재하지 않으며 정부에서 이용 가능한 방송용 주파수가 있을 경우 경매에 부쳐 최고액 낙찰자에게 일정기간 할당할 뿐이다. 이는 시장이 주파수 구매기업을 건전하게 만든다는 철저한 시장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둘째, 자율규제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규제완화에 따른 음란물의 유입 등 부정적 측면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대안으로 강조되고 있다. 싱가포르방송위원회(SBA:the Singapore Broadcasting Authority)는 업체들이 SBA가 제시한 인터넷 심의규정(the Internet Code of Practice)을 준수하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웹사이트 등급제를 채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히 음란물로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부모들에게 인터넷 관련 정보를 제공한 후 자녀를 지도하도록 하는 미디어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자율규제가 불만족스러운 경우에만 규제기관이 개입하고 있다. 내년도에 대대적인 규제개혁을 준비하는 태국도 자율규제를 강조하고 있다.
셋째, 문화정체성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자국 프로그램의 편성을 의무화하는 쿼터시스템에 상당수 국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는 TV나 라디오와 같은 전통적인 매체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같은 뉴미디어에 있어서도 질 높은 자국 프로그램의 편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보화의 진행과 함께 국민들의 뉴미디어 활용 비중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도 자국 프로그램과 어린이 프로그램 그리고 소외계층 대상 프로그램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합방송법(안)이 종전의 외국 프로그램 쿼터제에서 국내 프로그램 쿼터제로의 전환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쿼터제의 필요성과 「서비스분야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S:the General Agreement on Trade in Services)」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시장개방 압력에 대응하는 논리를 정리하고 있는 호주방송위원회의 발제문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호주 대표는 쿼터제가 필요한 첫번째 이유를 가격 경쟁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투자비용을 자국에서 회수한 후 싼값으로 수출하는 프로그램과 경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과 같이 큰 매체·광고시장을 지닌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시장환경을 지닌 호주 프로그램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에 굴복하면 미국 영상산업의 경쟁력과 크기 그리고 세계시장의 판도 등을 고려하면 호주의 영상산업은 도태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쿼터제는 유지돼야만 한다는 것이 호주방송규제기구 대표의 주장이다. 호주정부의 입장도 ABA와 마찬가지로 쿼터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ABA는 방송과 통신의 융합으로 새롭고 더욱 다양한 영상서비스가 가능해진 현 시점에서 쿼터제를 통해 문화적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방법을 취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론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쿼터제를 통해 호주 사회가 얻을 수 있는 혜택이 경쟁의 제한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초과하는지 또는 개방으로 인한 혜택보다 클 수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검토과정을 거쳐야만 불필요하게 경쟁을 제한하는 요소들을 제거할 수도 있고, 또한 공익의 사회적·문화적·경제적 차원들간의 형평을 유지하는 쿼터제의 논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에 따라 현재까지 이뤄진 연구들과 공청회 등을 통해 수렴한 의견들은 쿼터제의 유지를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GATS 협상에서 지속적으로 압력을 받을 것이라는 ABA의 지적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는 대만의 방송현실과 규제정책이 관심을 끌었다. 우리 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대만의 케이블TV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채널 수도 100여개에 달한다. 실제로 대만에서는 70여개의 SO가 CNN과 HBO 등 20여개의 외국 채널과 80여개의 국내 채널을 송출하고 있다.
대만측의 프레젠테이션에 의하면, 대만의 전파매체산업은 90년대들어 엄청나게 성장했다. 지난 93년에 33개였던 라디오 방송국 수는 8차례에 걸친 진입규제 완화로 현재 102개에 이르며, 허가되지 않은 소위 「지하방송국(underground radio station)」도 200여개에 이른다.
지상파TV는 현재 3개의 민영방송과 1개의 공영방송으로 이뤄져 있는데, 소위 「제4의 방송국(the 4th station)」으로 부르는 케이블TV로부터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상황은 당초의 허가목적에 대한 위반,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와 상업화, 기만광고의 등장, 케이블TV업계의 독과점 문제, 사업자간의 불공정 행위에 의한 궁극적인 시청자 피해의 발생, 전문 제작인력과 자본부족 문제 등을 야기하고 있다. 이를 위해 대만 정부는 TV사업자들의 기업공개, 소비자 권리의 보호와 강화, 음란폭력 프로그램 거부운동, 등급제의 시행, 광고의 규제, 관련법의 개정 등을 채택하거나 추진하고 있다.
대만의 사례를 간단히 요약하면, 먼저 구조규제를 완화해 그에 따른 경쟁의 가열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후에 행위규제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진입장벽을 허무는 구조규제의 완화와 등급제 도입 등으로 대표되는 행위규제의 강화가 동전의 양면처럼 이뤄지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규제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만의 TV산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아주 짧은 기간에 100여개에 이른 다채널이 협소한 대만의 매체시장에서 과연 어떻게 작동하는지 체계적으로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구조규제의 완화와 행위규제의 강화(예:통합방송법에 규정된 등급제의 도입)와 완화(예:심의의 폐지)를 복합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우리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이상 제4차 아태지역 규제 라운드테이블 회의에서 논의했던 사항과 몇몇 특기 사항을 살펴보았다. 이번 회의를 통해 대부분의 국가들이 상당히 빠르게 방송과 통신 환경변화에 대처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예를 들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말레이시아의 경우 방송과 통신을 모두 총괄하는 미국의 FCC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말레이시아방송통신위원회(CMC:Malaysian Communications and Multimedia Commission)를 올해 초 발족했는데 97년부터 준비를 시작해 98년에 관련법들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 법들이 얼마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지상파방송과 케이블TV 등 소위 대중전파매체만을 총괄하는 통합방송법 제정에 5년을 끌고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곡차곡 IT2000 프로젝트라는 정보사회 건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경우 일면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략보다는 합리성에 기초한 국가발전프로그램을 우선시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문밖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새로운 방송환경에 걸맞은 규제기구의 모델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