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콤 99 확대경> 선진국 "그들만의 잔치"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지난 9일 텔레콤99 개막연설이 이곳 제네바에 몰려온 세계 각국의 정보통신업계 관계자들은 물론 TV나 인터넷을 통해 이를 지켜본 수많은 지구촌 가족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다가올 새로운 천년은 정보통신기술이 세상을 바꾸게 될 것이며 그것은 인종과 계층간의 갈등, 빈부격차 등 기존 산업사회의 부조리를 제거해 나가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넷이라는 정보기술이 세계를 하나로 묶고 시간과 공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평등과 자유,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진정한 가치라고 역설했다.

 코피 아난의 이같은 연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새로운 밀레니엄 패러다임을 읽는 통찰력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압박과 소외의 상징인 제3세계 유색인종으로서 다가올 천년에는 정보기술을 통해 인류의 꿈을 실현하자고 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코피 아난의 이날 개막사를 지켜본 어떤 미국 기자는 『마치 마틴 루터 킹의 저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연설을 상기시킨다』고 흥분했다.

 그렇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기술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열려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그래서 세계를 하나로 엮어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 그 안에서는 피부색이나 이념적 성향, 국적,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코피 아난의 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공개된 텔레콤99는 인터넷이 과연 천사인지, 아니면 악마인지를 자문하게 하고 있다. 전세계 200개 나라의 장차관과 150개국의 기업이 참가한 이번 텔레콤99는 철저히 「그들만의 잔치」가 되고 있다. 「그들」은 바로 몇몇 정보기술 선진국의 주요 대기업이다.

 부스 설치비용에만 100억원을 쏟아붓고 조명시설 갖추는 데 50억원을 들이는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앞선 기술을 뽐내기에 여념이 없고 이곳을 찾는 수많은 기업인과 여론주도층에 바로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주역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들」에게 기술도 뒤지고 돈도 부족한 제3세계 국가들은 부스 한귀퉁이를 차지한 채 방문객들의 발걸음조차 뜸한 초라한 전시회를 갖고 있다. 이들 나라와 기업은 정보기술 혁명에 뒤져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이번 텔레콤99에 뛰어들었지만 스포트라이트 한번 못 받고 변방에 소외되고 있다.

 인터넷·정보기술이 인종과 계층,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제치려 하고 있지만 정작 그 현장에서는 산업사회보다 더욱 철저한 소외와 갈등만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지배구조가 정보사회에서도 여전히 이어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정보기술이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회의 모순구조를 더욱 증폭시키고 이를 확대재생산한다면 코피 아난의 명연설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연설처럼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인터넷과 정보기술은 이제 기로에 섰다. 천사의 얼굴을 할 것이냐, 아니면 악마의 모습으로 세상을 바꿀 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려면 제대로 바뀌어야 하고 그래서 전인류가 20세기의 끄트머리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제네바=이택기자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