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32);제 3부 국산화와 수출의 시대 (8)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장에 취임한 후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오원철 수석이 나에게 진흥회 회장을 권유한 것이 대통령의 뜻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진흥회 회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박 대통령이 「김 박사가 진흥회 회장이 돼? 거기서 무슨 일을 하지?」라고 물었다는 얘기를 비서관에게 듣고 나는 황당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취소할 수도 없었다. 이제는 소신대로 전자공업을 육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에게는 서신으로 나의 결심을 전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았다. 전자공업진흥회의 모든 업무와 인사, 예산집행 등을 상공부가 지시하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진흥회 직원은 이전에 상공부에서 근무하던 사람들 일색이었다. 상공부 전자공업국장이 진흥회 업무를 일일이 인준하는 직속상관이었다.

 그후로 알게 된 일이지만 전자공업진흥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산업부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진흥회·조합·협회 등은 예외 없이 상공부·체신부·농림부 등 해당부처에 예속돼 규약 하나 만드는 데도 일일이 승인 또는 허가를 받아야 했다. 관련부처의 골치 아픈 민원이나 기타 사무처리 등을 대행하는 일을 주로 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진흥회를 「대서소」라고 놀렸다.』 -김완희 자전 에세이 「두개의 해를 품에 안고」 중

 76년 출범한 한국전자공업진흥회(현 한국전자산업진흥회)의 역할에 대한 김완희의 표현은 다소 부정적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전의 뒷면」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대목은 진흥회의 발족과 운영 방식이 어떠했는가를 비교적 잘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70∼80년대 우리나라 전자산업 정책을 어떻게 기안해 추진했는가에 대해서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전제를 두고 진흥회의 출범과 발전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전자공업진흥회가 출범하기까지의 배경을 보면 67년 콜럼비아대학 교수였던 김완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출했던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의 내용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김완희는 이 보고서에서 초창기 전자산업의 효율적인 육성을 위해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과 함께 이를 전담할 기관으로 가칭 「전자공업진흥원(혹은 전자공업센터)」의 설립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되는 71년까지 마쳐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기관을 책임질 적임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무산시켰고 대신 기존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한국정밀기기센터(FIC)·국립공업연구소 등 3개 기관으로 하여금 진흥업무를 맡게 했다.

 진흥회의 발족문제가 재론된 것은 75년 10월 말 청와대에서 있었던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였다. 당시 장예준 상공부 장관은 대통령이 주재한 이날 회의에서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 그리고 FIC의 전자공업진흥업무를 통합한 강력한 민간 중추단체의 설립계획을 보고했다.

 이에 앞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전자업계는 그때까지 업무 중복과 영역다툼이 끊이지 않던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의 통합을 상공부에 건의했다. 정부에서도 73년 말부터 74년 초 사이의 제1차 오일 쇼크의 영향으로 주요 수출 대상국인 미국 등 선진국들의 보호무역주의가 기승을 부림으로써 어떤 형태로든 대응방안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업계 역시 선진국들의 보호주의에 맞서 강력하고 단합된 역량을 보여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이 대응방안으로 상공부와 업계의 시각은 대체적으로 두가지 안에 접근했다. 하나는 내외적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민간단체를 발족하자는 안이고 또 하나는 기존 민간단체들을 통합해 통제 효율성을 높이자는 안이었다. 전자산업 주무부처로서 새로운 수출진흥 아이디어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던 장예준 장관이 청와대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보고한 내용은 두번째 안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었다.

 제3공화국의 수출입국 정책에 대한 최고 지도자의 집념을 가늠할 수 있었던 수출진흥확대회의는 5·16직후인 62년 10월부터 시작해 80년대 제5공화국 시절까지도 존치된 일종의 초법적 정책기구였다. 월례회 형식으로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이 회의에서는 해당부처 장관과 공무원은 물론이거니와 기업인까지 참여해 수출증진을 위한 갖가지 대안들을 숙의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라서 주무부처 장관들은 갖가지 수출촉진 아이디어를 마련해서 보고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구가 당시 어느 선까지의 정책을 결정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69년 5월 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직접 민간기업들에 지시한 종합무역상사 설치안이다.

 장예준 장관의 보고가 있은 지 넉달 후인 76년 2월 20일 먼저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이 정기총회를 열고 조합의 발전적인 해산과 새로이 사단법인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의 성공적인 발족을 결의했다. 이날 다른 장소에서는 수출조합의 해산결의 직후 한국전자공업진흥회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창립총회에는 협동조합 이사장이던 금성사 박승찬 사장을 비롯해 초창기 금성사와 대립했던 삼성전자의 강진구 사장, 대한전선의 설원량 사장, 한국마벨의 이우룡 사장, 한국테레비(81년 한국전자로 통합)의 곽태석 사장, 아남산업의 김향수 사장, 대덕산업의 김정식 사장, 오리온전기의 이근배 사장, 삼화콘덴서의 오동선 사장, 동양정밀의 박율선 사장 등 당시 한국의 전자·통신업계의 내로라하는 거물급 기업경영자들이 거의 모두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초대 회장에는 박승찬, 상근 부회장에는 상공부 출신의 남계영이 각각 선임됐다. 또 비상근 부회장에는 강진구·이우룡·설원량 등이, 이사진에는 곽태석·김문주(삼미기업 대표)·김향수·박영택(동남전기 대표)·이석용(대우전자 대표)·오동선·박율선·문덕만(정풍물산 대표)·윤봉수 등 14명이 선임됐다. 일단 업계를 대표하던 주요 기업이 대부분 참여하는 막강한 임원진을 구축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정식출범은 상공부 장관의 설립인가를 받아 등기를 마친 76년 4월 20일이었다.

 그러나 진흥회 발족을 위한 통합의 다른 축인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측의 입장은 달랐다. 우선 협동조합의 설립근거가 중소기업협동조합법에 따른 것이어서 해산문제가 쉽지 않았다. 해산과 진흥회로의 통합을 반대하는 회원사들이 이점을 집중 부각시켰다. 반대파는 주로 중소기업 경영자들이었다. 이들은 협동조합이 진흥회에 통합될 경우 원자재 공동구판사업에 대한 특전과 기타 중소기업관계법에 의해 받고 있는 각종 정책지원이 중단될 것을 우려했다. 급기야 조합측은 진흥회 창립일에 맞춰 해산하기로 했던 것을 진흥회가 중소기업에 대한 사업의 특전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진흥회로의 통합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합은 통합절차를 마무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진흥회 창립총회날부터 업무통합기구를 편성하고 사무국 직원들을 양단체 모두에 겸직발령을 주어 근무하도록 했다. 사무실도 같은 장소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진흥회가 출범사무실을 조합이 세들어 있는 무역회관 2001호로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진흥회와 조합의 통합운영은 당초에 예상했던 바와 달리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중소기업에 대한 권익보호가 시간이 갈수록 소흘해지고 있다는 점에 조합측 회원사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통합운영 2년만인 78년 말 진흥회와 조합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진흥회와 조합의 결별은 두 단체나 업계 발전을 위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결별 후 79년 1월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이사진도 중소기업인 중심으로 구성했다. 고명철(서진전자 사장)·김영수(한국전자 사장)·김홍찬(광림전자 사장)·유제흥(한국코아 사장)·고석영(한국전기음향 사장)·변봉덕(중앙전자 사장) 등이 그 임원이었다. 사실상 중소기업 전문조합으로 재출범한 셈이었다. 다만 이사장직만은 진흥회와의 연계를 위해 진흥회 회장인 김완희를 선임했다.

 김완희는 이에 앞서 78년 12월 진흥회의 임시총회에서 상근회장에 추대됐다. 진흥회에서 상근회장은 현재까지도 김완희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진흥회는 김완희 체제로 개편되면서 비로소 민간단체로서의 역할, 그리고 정부와 업계 사이의 연결고리로 역할에 날개가 돋기 시작했다. 회원수도 80년을 전후해 240개사 이상으로 증가했다. 업무관장영역도 대폭 확대돼 79년에는 FIC가 주관하던 한국전자전람회(KES) 등 진흥업무를 흡수한 데 이어 80년에는 최대 이권사업의 하나였던 한국전기용품제조협회의 전기용품에 관한 수입추천업무까지 이관받았다. 이로써 60년대 말부터 정부가 표명해오던 강력한 전자산업진흥기관의 운영은 그 안이 제기된 지 10여년만에 실현된 셈이었다.

 한국전자공업진흥회는 앞서 인용한 김완희의 자전 에세이에서처럼 운영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정적 측면을 노출시켰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기업의 특성을 무시한 채 정부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의 운영이나 민간업계를 통제의 대상으로 인식한 관료주의는 오히려 기업들의 자생력을 저하시킨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흥회가 87년 전자부문 수출 100억달러 달성, 그리고 이에 앞서 80년대 초반 섬유 등을 제치고 전자산업을 수출 1위 품목으로 부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이견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