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인터넷 탄생 30년> 인터넷의 발자취

인터넷에도 선사시대가 있었다. 69년이 인터넷의 원년이지만 네트워크의 미래를 예고하는 신호탄은 이미 57년에 쏘아올려졌다. 구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를 발사한 것.

 냉전체제하에서 소련에 선수를 뺏긴 미국은 이른바 스푸트니크 충격에 빠졌고 국가안보에 위협을 느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서둘러 미 국방부 산하에 첨단연구프로젝트국(ARPA: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이하 알파)을 신설했다.

 알파는 국방관련 첨단연구를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다. 알파를 연구소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은 오해다. 자체 연구소를 갖지 않는 대신 알파는 대학과 기업에 용역을 주고 그 계약만 관리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들의 조직이었다.

 1960년대부터 알파는 행동과학, 물성과학, 탄도 미사일 개발처럼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지원해 왔다. 알파는 미국 최고의 두뇌를 가진 인재들에게 돈을 투자했고 18개월만에 인공위성을 발사, 소련을 따라잡았다.

 한숨을 돌린 알파의 프로젝트 매니저들은 컴퓨터 과학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62년 정보분야를 지원하기 위한 부서인 정보처리기술실(IPTO:Information Processing Techniques Office)이 만들어졌다. 당시 IPTO에서는 컴퓨터 그래픽, 인공지능, 컴퓨터 네트워크 등 컴퓨터와 관련된 최첨단 분야를 연구해 이들 분야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드디어 69년이 왔다. 「하느님이 태초에 인간을 만드셨다」는 성서의 창세기를 인용해 엔지니어들은 『알파가 태초에 알파넷(ARPAnet)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전용선으로 연결된 패킷망이었던 알파넷은 인터넷의 백본(Backbone)이 됐다.

 알파넷을 가동시키기 위해 알파는 네트워크 워킹 그룹(Network Working Group)이라는 특별팀을 구성했다. 이들이 9월 2일 알파넷을 처음으로 인스톨시켰고 당시 UCLA와 스탠퍼드연구소(SRI), UC샌타바버라(UCSB), 유타대 등 4군데에 노드가 설치됐다.

 알파넷을 타고 UCLA에서 스탠퍼드연구소(SRI)로 첫 번째 신호가 날아간 것은 30년 전 오늘인 69년 10월 25일이다. 그날 UCLA에는 인터넷의 아버지 빈트 서프가, 스탠퍼드연구소에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발자 더그 엥겔버트가 인터넷 탄생의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봤다.

손으로 쓴 메모 한 장이 호스트 투 호스트(Host to Host)의 통신망을 타고 이동하는 순간 환성이 터졌다. 70년대는 인터넷의 여명기였다. 벨연구소의 프로그래머 데니스 리치(Dennis Ritchie)와 케네스 톰슨(Kenneth Thompson)가 UNIX를 개발했던 70년 알파넷은 한 달에 한 개 꼴로 새로운 노드를 추가했다. 다음 해에는 텔넷 프로토콜이 완성됐고 파일 트랜스퍼 프로토콜(FTP:File Transfer Protocol) 표준화도 윤곽이 드러났다. 인텔이 4004칩을 발표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신기원을 열 무렵이었다.

 알파넷을 통한 전자우편 프로그램이 나온 것은 72년. 그 해에 알파넷에 대한 첫 번째 공개 데모가 이뤄졌다. 40대의 컴퓨터가 동원된 이 시연회는 학계에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워싱턴의 힐튼호텔 지하실에 패킷 스위치와 터미널 인터페이스 프로세서(TIP)를 인스톨시킨 후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 알파넷의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게 해보자는 계획이 성공하자 인터넷의 미래를 미심쩍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73년도 인터넷 역사에 있어 중요한 해다. 컴퓨터업계에도 변화가 많았다. 벨연구소가 C언어를 개발했고 팰로알토의 제록스연구소가 스몰톡이라 불리는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인터넷은 이제 미국의 네트워크에서 세계의 네트워크로 진화했다. 인터넷의 국제연결이 처음으로 이뤄지면서 글로벌 네트워킹이 실현된 것. 런던대와 노르웨이의 왕립레이더연구소(Royal Radar Establishment)가 연결되면서 비로소 인터넷이라는 단어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해말까지 BBN과 나사, 국립표준사무국, 공군연구소 등 30개의 연구기관이 인터넷으로 묶였다. 70년대는 유즈넷의 개발과 함께 저물었다.

 80년대가 시작되면서 컴퓨터가 화두로 떠올랐다. 81년 8월 IBM PC가 선보였고 82년엔 타임지가 컴퓨터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이어서 84년에는 애플이 매킨토시를 발표했고 같은해 소설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뉴로맨서(Neuromancer)」라는 공상과학소설에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라는 말을 처음 썼다. 이쯤되자 「정보혁명」이라든가 「제3의 물결」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80년대는 인터넷의 성장기다. 아직 대중 속에 파고들지는 못했어도 꾸준히 호스트가 불어났다.

네트워크가 TCP/IP라는 언어를 갖게 된 것은 82년. 다음해에는 인터넷 호스트 수를 측정하기 위해 도메인 네임 시스템(DNS:Domain Name System)이 만들어졌고 84년 1월부터 .gov, .mil, .edu, .org, .net, and .com. 도메인들이 생겨났다.

 86년초부터 87년말까지 네트워크의 수는 2000개에서 3만개로 불어났고 세계 각국이 인터넷을 주목했다. 89년엔 오스트레일리아·독일·이스라엘·이탈리아·일본·멕시코·네덜란드·뉴질랜드·영국이, 90년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아르헨티나·오스트리아·벨기에·브라질·칠레·그리스·인도·아이슬랜드·스페인·스위스가 인터넷에 합류했다.

 인터넷 대중화가 급속하게 이뤄진 것은 9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다. 91년 팀 버너스 리(Tim Berners Lee)가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해 월드와이드웹(WWW)을 제안했고 아키(Archie), 고퍼(Gopher), and WAIS처럼 다양한 툴이 등장했다.

 92년에는 인터넷 소사이어티(ISOC:The Internet Society)가 설립됐고 NCSA 학생들이 웹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를 만들었다. 모자이크는 주술적인 마력으로 젊은 엔지니어들을 인터넷의 영토로 불러들였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앤드리슨이 93년 넷스케이프를 개발하면서 인터넷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세계 인터넷 인구는 1억명을 돌파했고 오는 2000년에는 3억명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이제 인터넷은 지구촌의 글로벌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