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호무역주의의 발호
우리나라 연간 총 수출액이 대망의 100억 달러를 돌파한 해가 1977년이다.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따르면 100억 달러 수출은 원래 1980년에 달성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니까 정부의 목표가 무려 3년이나 앞당겨 달성된 셈이었다.
100억 달러 가운데 전자산업부문이 차지한 비중은 11%인 11억 달러나 됐다. 1967년 전자산업부문의 수출액이 고작 654만 달러였으니까 10년만에 무려 168배가 신장된 셈이었다. 100억 달러 가운데 전자산업이 차지한 11%의 비중은 32%의 섬유류에 이어 2위에 해당되는 수치였다.(전체 수출액에서 전자산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1위로 올라선 것은 1987년의 일이다) 같은해 전자산업부문 총생산 규모 역시 10년 전에 비해 50배나 늘어난 17억5800만 달러나 됐다.
1969년부터 추진된 전자공업육성 8개년 계획에 따르면 계획이 마무리되는 1976년의 수출 목표액은 4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실제 달성액은 250%나 초과된 10억 달러였다. 내수와 수출비중은 평균 4대6정도로 수출이 높았는데 이 역시 수출기반의 경제성장정책을 편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주요 분야의 국내 생산계획은 어디까지나 수출을 전제로 세워지고 추진됐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자유무역주의 정신에 따라 미국·영국·프랑스 등 선진국이 한국 등 개발도상국에 일반특혜관세(GSP)를 공여해가면서까지 국제 무역량 확대를 꾀했던 것도 수출신장에 큰 몫을 했다. 선진국들의 GSP공여 정책에 따라 개발도상국의 무역량은 연평균 18%씩 신장하는 추세를 보였다.
한국의 경우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 9년 동안 연평균 수출 신장률이 무려 43%나 됐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이 선진국을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이후 자국 시장에 개도국들의 물품 수입이 급등하자 선진국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한국·대만을 비롯해서 일본의 수출이 급신장세를 보이자 선진국들이 자국의 산업 보호를 내세워 제동을 걸고 나섰다. 1976년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보호무역주의는 1978년에 들어 정점을 이뤘다.
이때 나타난 보호무역주의는 대상 품목에 보호관세를 부과하던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수입할당제, 자율규제, 시장질서 협정요구 등 주로 비관세 방식들이 동원되는 양태를 보였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들은 신보호무역주의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1차대전 직후 나타났던 보호관세부과 방식의 보호무역주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보호무역주의의 대두는 다수의 수출 주력품목들을 공급하던 전자산업부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보호무역주의의 대상이 된 대표적인 품목들이 컬러TV, 흑백TV 그리고 라디오였다. 컬러TV는 미국, 흑백TV는 영국, 라디오는 프랑스가 각각 그 진원지였다.
컬러TV의 경우는 지난 33회 「TV전쟁」에서도 언급했듯이 국내에는 아직 컬러TV방송이 방영되지 않는 상황에서 수출 주력품목으로 부상한 특이한 케이스였다. 금성사·삼성전자·대한전선 등 가전 3사가 조만간 컬러TV방송의 방영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서둘러 양산체제를 갖춘 것이 1977년. 하지만 과소비와 국민위화감 조성이 우려된다는 시기상조론에 밀려 방영시기가 계속 늦춰지자 3사는 그 대안으로 미국시장을 뚫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컬러TV 대미수출량은 1974년 한국나쇼날이 처음 42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한 이래 1976년까지는 780만 달러 수준에 머물렀으나 3사가 양산체제를 갖춘 1977년에 1600만 달러, 그리고 1978년에는 그 6배에 가까운 9370만 달러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1978년 현재 국내 컬러TV생산량은 22만대였고 이 가운데 97%가 대미수출물량이었다. 수출치만을 놓고 볼 때 컬러TV는 이미 전자산업 부문에서 제1의 수출품목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산규모에서도 전자산업 전체 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대에 육박하면서 반도체 조립가공과 흑백TV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미국정부가 자국내 TV업체 보호를 명목으로 한국정부에 자율수출규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 정부는 또 한국에서 소비되지 못하는 상품을 왜 자국으로 밀어내느냐는 항의메시지도 함께 전달해 왔다. 정부와 업계가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이에 앞서 미국은 1977년 3월 워싱턴에서 미일 정상회담을 갖고 10년 동안이나 끌어오던 일본과의 컬러TV 통상마찰을 해소하는 「일본의 대미수출 자율규제 원칙」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같은 해 5월 양국정부간에 체결된 이른바 시장질서협정(OMA)을 보면 주요내용은 일본산 컬러TV의 대미수출 자율규제기간은 1977년 7월부터 1980년6월까지로 하고 이 기간에 수출물량은 완제품 156만대와 반제품 19만대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4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미정부간 컬러TV협상도 결국은 이 미일협상 방식이 적용됐다. 한미정부간 체결된 OMA의 내용은 1978년 12월부터 1980년 6월까지의 기간에 한국산 컬러TV의 대미수출량을 41만1000대로 줄인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여파로 가전3사의 컬러TV가동률은 1979년 한때 20%대까지 곤두박질쳤고 수출액도 1978년보다 2500만여 달러나 감소한 7200만 달러에 그치고 말았다. 관련 부품업계 역시 부품수주량이 전년도 대비 40%대로 감소했다. 부품업계의 경우는 거의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컬러브라운관, 트랜스류 등 부품의 국산화율을 85%대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선행투자가 집중되던 시기여서 그 피해는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정부가 한국산 흑백TV 수출 쿼터의 조정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이보다 1년 앞선 1977년 7월이었다. 영국정부 역시 자국내 TV업체들의 보호와 시장질서 유지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방적인 수입규제를 통보해왔다. 하지만 영국정부의 명분은 취약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국산 흑백TV가 영국에 수출된 것은 1975년부터였고 그 규모도 연간 300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명분은 약했지만 우리정부로서는 냉혹한 국제무역질서의 한 단면이랄 수 있는 영국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정부가 수입규제에 대한 근거로 삼은 것은 GATT의 긴급조치로서의 수입제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민간업체들에 의한 자율규제(VRA)방식으로 운영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어 한국과 영국간 흑백TV쿼터 조정협상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와 영국라디오공업위원회(RIC)간 한영민간통상회담으로 대체됐다. 1979년 8월까지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개최된 이 회담에서 양측은 1977년에서 1979년까지 3년동안 한국산 흑백TV의 대영 수출량을 19만대로 제한키로 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프랑스가 라디오수출쿼터 조정을 요구해온 것은 1978년 1월이었다. 역시 민간업체들에 의한 자율규제방식으로 협상을 진행한다는 GATT의 정신에 따라 한국전자공업진흥회와 프랑스전자공업협회(GIEL)가 양국을 대표해서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2차례의 회담을 가졌다. 프랑스정부는 이에 앞서 1969년부터 한국과 홍콩 등에 대해 라디오 수출쿼터량을 배정해왔는데 1978년의 협상에서 양국 대표들은 한국측이 요구한 1979년의 수출물량 26만4000대를 20만대로 조정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았다.
수출 100억 달러 조기 달성 때문에 치른 대가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선진국들은 자국내 수입규제 외에도 한국의 시장개방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20여년 가까이 지속되던 수출일변도의 정부정책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정부는 결국 1978년 한해동안 3단계에 걸쳐 19개 품목에 대해 수입자유화조치를 취했다.
우선 이 해 5월에 취해진 1단계에서는 흑백TV·전기냉장고·선풍기 등 완제품과 냉장고부품인 퍼머넌트 마그넷 등 4개 품목이 수입자유화 됐다. 9월의 2단계에서는 라디오·건전지·축전지(차량용)·전구·면도기·커피포트 등 9개 품목에 대해, 그리고 12월의 3단계에서는 다이얼식전화기·주상변압기·전력용콘덴서 등 6개 품목이 각각 수입자유화 됐다.
흑백TV·전기냉장고 등 가전기기들에 대한 수입자유화는 초기 정부와 관련업계를 크게 긴장시켰다. 세련된 디자인과 기술집약적인 외제품에 대해 일반 소비자들이 현혹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업계가 우려하는 수준의 시장잠식은 없었다. 국산제품이 나름대로 가격경쟁력을 갖고 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수입자유화 품목에 대해 최고 60%까지의 관세율이 적용됐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비자들의 애국심에 호소한 당국의 적극적인 계도정책도 단단한 몫을 해줬다.
1970년대 후반에 대두된 신보호무역주의는 앞만 보고 달렸던 수출지향의 정부주도 경제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기술자립이나 내수시장 부양없이 조립생산 또는 임가공 수준에 머물던 전자산업 부문 역시 정책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