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산업의 태동
1970년대 중반 전자산업계의 주된 사업영역은 흑백TV, 냉장고, 선풍기, 전자레인지 등 정부가 수출을 주도하고 장려하는 가전 분야에 집중돼 있었다. 가전 분야는 이미 기업규모로 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산업연관 계열로 봐서는 완제품업계와 부품업계가 상당한 수준의 계열화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 컴퓨터 분야는 기업들이 신규 진출을 적극 검토하던 단계였다. 1967년 국내에 컴퓨터가 처음 도입된 이래 10여 년이 지났지만 단일 산업 분야를 형성할 만큼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컴퓨터의 보급 역시 극히 일부 대기업이나 관공서의 전산화용으로 한정돼 있었고 수량도 몇 백대 수준을 넘지 못했다.
컴퓨터 분야를 이끌던 기업들도 미국계의 한국IBM·스페리코리아, 일본계의 파콤코리아 등 외국계 현지법인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동아무역·동양전산기술(OCE)·서흥전기 등 외국컴퓨터회사 국내 대리점, 한국전자계산·서울컴퓨터학원 등 소프트웨어 용역개발회사들이 가세하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그 규모나 세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컴퓨터 분야가 독자 산업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자본력이 넉넉한 대기업들의 참여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대기업들이 조기에 컴퓨터 분야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 것은 관련 기술이나 노하우 축적이 전무했던 데다 시장전망도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컴퓨터도입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지 못한 사회경제적 원인도 컸다. 정부의 정책결정이나 투자에 대한 우선 순위에서도 컴퓨터는 항상 가전과 부품 등 다른 전자 분야에 밀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1976년을 전후하여 국내 컴퓨터 도입이 급증세를 보이고 OCE와 같은 중소기업이 미니컴퓨터를 국산화하면서 대기업들의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OCE가 개발한 국산 컴퓨터는 IBM의 인기를 위협하던 미국의 디지털이퀴프먼트(DEC)의 「PDP 11」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PDP 11」은 국내에서도 IBM 기종 다음으로 판매 대수가 많았다.
이 기종에 대해 OCE는 1976년 중앙연산장치(CPU)와 보조기억장치 그리고 브라운관(CRT)터미널 등 부품을 각각 따로 구입하여 완성품을 조립해내는 방식으로 국내 생산에 성공했다.
이 제품이 상용 국산컴퓨터 1호로 기록되고 있는 「오리콤540」이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나중에 두산컴퓨터·삼보컴퓨터·엘렉스컴퓨터·삼성전자 등에 스카우트돼 1980년 국내 컴퓨터산업을 일구는데 일조했는데 그 인물들은 이윤기·권순덕·김천사·김병각·김주현·김영한·김영식·최규대·이정희·김의현 등이다.
「오리콤540」을 통해 대기업들은 전자산업이 고도화돼 가면서 전자기기 용도가 가정에서 산업 현장으로 확대돼 갈 수 있음을 보았다. 산업용 전자가 바로 컴퓨터인데 이때부터 대기업들은 부랴부랴 시장진출을 검토하고 제품 공급선을 확보하거나 직접 생산방법 등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1976년을 전후해서 이 같은 움직임을 보였던 대기업들로는 삼성전자·금성사·금성전기·금성통신·동양정밀(OPC)·벽산·쌍용양회·두산 등이었다.
이들의 컴퓨터 분야 진출에 대한 검토는 2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미국과 일본 컴퓨터 기업과 제휴, 국내에서 합작 생산을 추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국기업의 대리점 사업을 통해 우선 노하우부터 축적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산화 활동이 본격화되던 1980년대 중반까지 컴퓨터 분야는 사실상 외국기종을 국내에 공급하고 이를 유지 보수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 금성전기와 선경이 일본전기(NEC)의 미니컴퓨터기종 조립생산 검토에 나섰고 대한전선은 후지쯔의 「파콤」시리즈 생산을 추진했다. 금성통신과 OPC는 합작회사인 한국시스템산업을 설립하고 외국의 기술 제휴선을 찾아 나설 정도였다.
또 후자 입장에서 외국업체의 국내 총대리점 사업에 나선 곳은 삼성전자(휴렛패커드), 금호실업(왕래버러토리즈), 두산(디지털이퀴프먼트), OPC(데이터제너럴), 한국화약(포 페이스), 효성(히타치) 등이다. 금성사는 79년 맨 마지막으로 하니웰사 제품을 국내 공급하면서 컴퓨터사업 참여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때 시작된 컴퓨터 사업이 오늘날과 같은 종합정보통신사업 형태로 발전한 곳은 금성사와 삼성전자 정도뿐이다. 나머지 기업들은 모두 도산했거나 사업담당 부서가 다른 기업으로 인수된 경우에 해당된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있던 「PDP 11」을 공급함으로써 재정적 안정 기반을 확보했던 OCE의 경우는 국산컴퓨터 「오리콤540」의 판매난으로 결국은 1980년 두산그룹으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두산그룹 역시 OCE를 기반으로 두산컴퓨터를 세우고 DEC독점대리점으로서 승승장구하지만 1988년 DEC이 현지법인을 설립하자 조직자체가 공중분해 돼버렸다.
금호실업은 컴퓨터코리아라는 기업에 사업 자체를 넘겼고 OPC는 동양시스템산업이라는 계열사를 통해 투자의욕을 보였지만 1980년대 말 그룹 전체가 부도를 내면서 운명을 달리했다. 금성전기와 금성통신은 금성사로 조직이 이관됐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삼성전자와 금성사의 컴퓨터 사업 부문에 대한 계보도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삼성전자의 휴렛패커드(HP)사업부문은 1984년 삼성휴렛팩커드로 독립돼 나갔고 금성사의 하니웰사업 부분 역시 81년 하니웰본사와의 공동 기술제휴 계약에 의해 계열사인 금성반도체로 이관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삼성전자와 금성사 두 별 가운데 컴퓨터 사업을 먼저 시작한 것이 삼성전자 쪽이다. 1970년대 초반 가전 분야에 이은 컴퓨터 분야에서의 별들의 전쟁은 1976년 HP와 대리점계약을 체결한 삼성전자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삼성전자가 컴퓨터 사업에 진출하게 된 배경에는 전자산업 전반에서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인 금성사를 의식한 점이 없지 않았다. 가전 분야에서는 선발과 선두를 내주었지만 컴퓨터 분야에서 만큼은 앞서겠다는 전략이었다.
삼성이 컴퓨터 분야 진출 결정을 내린 것은 이미 1975년 말이었다. 삼성전자는 이때부터 미국과 일본지역의 그룹 거점망을 통해 대상 기업 물색에 나선다. 접촉 대상은 우선 국내에 현지법인이나 총대리점이 없으면서 시장성이 높은 제품을 내놓고 있는 기업이었다. 이때 삼성이 눈여겨보았던 곳이 바로 HP였다.
HP는 1939년에 설립된 회사지만 컴퓨터 사업은 1974년에서나 시작한 신생기업이나 다름없었다. 삼성은 일본 요코가와휴렛패커드(YHP)의 중개로 1976년 8월 HP와 컴퓨터와 계측기 분야의 국내 독점공급 계약을 맺고 전자사업본부 내에 컴퓨터시스템부를 신설했다. 부장급이던 전인수가 컴퓨터사업을 총괄했고 영업과장에 김영한, 지원과장에 임득순 등이 가세했다.
삼성전자의 선공에 대한 금성사의 응수는 1978년에 나왔다. 금성사는 당시 부사장이던 심흥주를 사업부장으로, 김대규를 컴퓨터본부장으로 하는 컴퓨터사업부를 발족시켜 삼성전자 컴퓨터시스템부를 물량작전으로 제압하고 나섰다.
삼성과 마찬가지로 금성 역시 78년 미국의 하니웰과 독점총판계약을 맺고 「하니웰 레블 6」 기종의 국내 공급을 추진했다. 양사 모두 미국산 컴퓨터기종을 들여와 공급하는 총판영업으로 국내 컴퓨터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전쟁은 예상외로 싱겁게 끝나고 만다. 사실 금성사보다 2년 먼저 사업을 시작한 삼성전자의 승리는 이미 예고된거나 다름없었다. 금성사 입장에서도 80년대를 기대하는 선에서 경쟁을 매듭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76년부터 1979년 말까지 삼성전자가 국내에 공급한 미니컴퓨터 「HP 3000」은 무려 50대가 넘는다. 반면 금성사는 사업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긴 하지만 이 기간에 공급한 기종은 계열사인 럭키화학에 공급한 「하니웰 레블 6」 단 1대 뿐이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12년 동안 국내에 공급된 컴퓨터는 기종에 상관없이 약400대 정도였다. 미니급과 가격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초대형기종 공급에 치중했던 한국IBM은 같은 기간에 38대를 공급했다. 삼성전자 컴퓨터사업부의 고속성장을 대변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금성사의 컴퓨터사업부가 1980년 이전까지 주력한 사업분야는 실제로는 컴퓨터가 아닌 금전등록기나 전자식 출납회계기와 같은 사무기기였다.
이 가운데 1976년 금성중앙연구소의 출범과 함께 국내에서 처음 개발된 전자식 금전등록기 「GCR 104」는 반도체 집적회로를 채용한 것으로서 컴퓨터에 맞먹는 기능을 수행한다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